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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간녀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사업을 말아먹고 아빠는 한동안 정신줄을 아예 놔버렸다. 틈만 나면 목을 매고, 번개탄을 피우며 오로지 죽을 궁리에 미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죽으려고 발버둥을 쳐봐야 매번 귀신같이 엄마가 나타나 목숨을 건져냈으니 역시 사람 명줄은 타고나나 보다. 아빠는 정신을 차리고서야 본격적으로 먹고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우리 가족에게 등장한 여자가 있었다.  


언뜻 봐도 야매로 한듯한 쌍꺼풀이 부담스럽기 그지없고 눈빛 자체가 흐리멍덩한 40대 후반의 여자. 유명 여배우와 똑같은 이름으로 개명하고서 자신의 이름 석자가 불릴 때 묘하게 남들 시선을 즐기던 여자.


아빠는 사업차 우연히 이 여자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억울하게 이혼을 당하고 홀로 카페를 하는 불쌍한 여자라고 했다. 그렇지만 활달한 성격에 패션 감각도 있고 영업력도 좋은 여자라고 했다. 아빠가 재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인맥과 정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귀인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망하고 이모한테도 손절당하는 판에 생면부지의 남이 우리를 도와준다니 오히려 고마워했다.


아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에 와서 이 여자사생활과 근황에 대해 브리핑을 해댔다. 가족 누구도 여자에 대해 궁금해 한적도 물어본 적도 없었지만 본인이 알아서 여자에 대한 정보를 집안에 퍼대기 시작했다. 이 여자에 대한 TMI*에 하도 노출되다 보니 당장이라도 이 여자의 일대기를 자서전으로 써줄 수 있을 만큼 통달하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TMI*: Too Much Information에서 앞글자 하나씩을 딴 것으로써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는 정보를 뜻함


우리 가족은 그 여자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가끔 같이 밥도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 여자가 갑상선 수술을 했을 때는 엄마가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여자는 학비가 없어서 대학을 휴학하고 있던 내게 자신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고, 한 푼이 아쉬웠던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만 해도 아빠의 설명대로 그저 퍼주기 좋아하는 정 많은 여자인 줄 알았다.


집에 가면 아빠가 이 여자의 이야기를 집안에 전파하기 바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면 여자가 아빠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하기 바쁜 이상한 TMI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여자의 논조가 묘하게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랑 백운호수에 있는 파스타 집에 갔는데 맛있게 드시더라,

아빠가 잘 나갈 때 수입차 산다고 사치 부린 거 가지고 엄마랑 뭐라 하지 말아라,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가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 경계해라"


슬그머니 아빠의 과거 실수에 대해 실드를 쳐주고 엄마를 견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서도 이래라저래라 간섭질을 하며 선을 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엄마, 여자 무슨 작은엄마 (첩) 행세를 하네?"

엄마에게 이런 농을 던질 때만 해도 그냥 내 기분 탓이려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내게 아빠의 휴대폰을 건넸다. 

받은 문자함은 텅 비어있는데 멍청하게도 보낸 문자함에는 그 여자와 나눈 문자들이 자동 저장되어 있었다.  


이 미친 연놈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불륜 상대를 철저히 숨기는 일반적인 수법에 탈피하여 서로를 가족에게 아예 오픈하는 역발상을 시도했다. 가족들에게 상간녀의 미담을 알리며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여기에 가족들과 유대관계까지 형성해 안심까지 시키는 나름의 고급 전략을 쓴 것이다. 불륜남녀는 서로를 세상 쿨한 남사친 여사친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인생의 구원자로 미화했다.


나는 상간녀의 카페에서 돈을 벌고, 엄마는 상간녀의 병문안을 가며, 온 가족은 매일 두 연놈의 더러운 연애담을 보고 받는 등신들이 되어버렸다.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막장인 것이 그때 내가 사는 현실이었다.   


애비의 불륜을 알게 된 충격과 환멸이 가실 틈도 없이 딜레마가 몰려왔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할 것이냐, 말 것이냐. 공식적으로 두 번째가 되는 애비의 외도를 터트리는 순간 온 집안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자명했다. 집이 망해서 애들은 학업을 작파하고 여름이면 비가 새는 집구석에서 사는 것도 처절해 죽겠는데 남편이 바람까지 피우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 어떤 여자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불륜 사실을 숨겨서 집안에 가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식까지 엄마를 속이는 꼴이 된다. 하룻밤을 꼬박 고민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엄마, 이 인간 바람났어"

식탁으로 반찬을 나르던 엄마가 순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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