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거울은 과연 화장이 가능할 만큼 얼굴을 잘 비추나?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밝혀진 합금 비율
이 거울의 아래쪽 중앙에는 사각 테두리 안에 ‘고려국조’ 즉 메이드 인 고려라고 적혀있다.
이 글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거울은 고려에서 만들어졌으며, 수출품이라는 사실이다. 이 청동거울은 어느 나라에 수출하던 물건일까?
우선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청동거울의 쓰임새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거울은 얼굴을 잘 비출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청동거울 하면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동거울은 의식행사용 청동거울의 시대를 지나 그 이후 실용적 기능을 가진 거울로서 계속 사용된다. 구리에 다른 금속을 어떤 비율로 섞으냐에 따라 경도를 높게 하는 방법과 거울의 기능을 위해 표면이 곱고 매끄러우며 잘 비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거울로서의 기능을 강화하여 사용한다.
청동 거울의 성분 분석 결과 구리 42%, 주석 27%, 아연 7~9%의 합금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표면이 곱고 매끄러우며 잘 비치도록 한 것이다. 도끼는 구리 41%, 주석 19%, 아연 25%를 합금하여 강도를 높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합금 기술을 지녔음을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동기 시대 과학 기술의 결정체 '청동 잔무늬 거울'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 2012. 4. 30., 윤용현)
위 사진은 도쿄 국립박물관에 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구리에 다른 금속을 어떤 비율로 섞으냐에 따라 경도를 높게 하는 방법과 거울의 기능을 위해 표면이 곱고 매끄러우며 잘 비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청동거울은 얼마만큼 잘 보이나?
중국 서안 박물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당나라의 아름다운 이 여인은 저 큰 거울을 하녀로 하여금 들고 있게 한다. 저 거울은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인다. 만약 잘 보이지 않았다면 하녀를 고문하려고 저 무거운 거울을 들고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청동거울은 화장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보인다.
여기서 잠깐 재밌는 사실 하나!
청동기시대의 거울은 대부분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아래 그림처럼 부족의 지배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목에 걸던 거울이었다. 제사를 지내던 날은 햇빛이 무척 강한 오후였을 것이다. 지배자는 햇빛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높은 단 위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부족민들이 고개를 잠깐 들어서 단 위를 올려다보자 청동거울에 태양빛이 반사되는 모습이 마치 태양이 지배자의 몸에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얼굴을 비춘다거나 강도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닌 빛을 최대한 반사시키기 위한 물건이었던 것이다.(빛을 반사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표면이 매끄럽다는 것이니 얼굴을 잘 비추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 부족장이 목에 청동거울을 안정적으로 걸고 있기 위해서는 줄을 거는 장치가 필요하다.
거울 뒷면의 '뉴'라고 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거울은 주로 이 뉴가 한 거울에 두 개가 있으며, 뉴의 위치가 가운데가 아닌 약간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목에 걸었을 때 안정적으로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설계이다. 하지만, 고려국조 거울이나 당나라 시대의 청동거울은 주로 거울걸이에 놓고 화장을 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나무 막대기 등을 꽂아둘 수 있는 하나의 '뉴'만 있으면 되었으며, 위치도 정중앙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일본 도쿄박물관에 갔을 때 본 청동거울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거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즉 뒤편 장식면뿐 아니라 앞쪽 얼굴을 비추는 거울 면도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함께 여행을 갔던 선생님의 오래전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있다.
윤두서는 무엇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자화상을 그렸을까?
우리가 누구나 아는 윤두서의 자화상. 부리부리한 눈매가 너무나 사실적이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윤두서는 무엇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자세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우리나라에 유리거울이 들어온 것은 1766년 중국을 통해 러시아 무역상들에게 구입한 것이라고 하고, 보편화되는 것은 20세기 초라고 하니 윤두서는 유리거울로 자화상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자화상 역시 청동거울(정확히 말하면 백동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이다. 해남 녹우단에 가면 공재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백동 거울이 전시되고 있다.
국가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과 제사다
그렇다면 다시 ‘고려국조’거울로 돌아가 보자.
이 고려국조 거울은 의식용 거울이 아니라 실제 화장용으로 사용된 거울이다. 그리고 이 거울은 중국으로 수출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구리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청동기를 만든 역사 또한 우리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런데, 왜 고려로부터 거울을 수입하였을까?
그 궁금증을 푸는 데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국의 <예기>등 예에 대한 책을 보면 제일 먼저 제시하고 있는 문장은 <국가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과 제사다>라고 나와있다. 전쟁은 이해가 되지만 왜 제사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중국은 수없이 많은 왕조들이 전쟁을 벌였다. 또한 중국의 외부에서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략해왔다. 그러다 보니 나라를 존속하는 데 있어 전쟁은 너무나 중요한 일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경우 오늘은 이 나라 백성이었다가 내일은 다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충성심과 세금을 걷는 것이다. 전쟁은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백성들의 세금과 인력 징발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집과 재산, 농작물 등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쉽게 군사로 나가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한다거나 세금을 잘 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국가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백성과 이 나라가 하나라는 것을 세뇌시키는 일종의 큰 행사였다. 이 행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일이 있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했다.
고종은 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을 세웠을까?
일제와 외세에 고통받은 시절, 고종은 많은 돈을 들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왕에서 황제가 된다. 그리고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예법이 있었기 때문에 왕일 때는 사직, 그러니까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황제가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고종의 이런 '행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허튼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 막대한 예산으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에 투자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견을 동의도 하지만,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으며, 실제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하기 전날 어가 행렬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거울이 어쨌다고?
이게 그런데, 거울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우리나라는 종묘제례에 쓰이는 도자기나 놋그릇을 한번 사용하고 나면 잘 보관했다가 다음 제사 때 사용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무조건 한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 사용하지 않고 다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제사 때는 다시 제작하였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종묘제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숫자의 제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게 다 1회용이다. 그러다 보니 구리를 아무리 생산해도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구리로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거울을 생산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시기가 많았다. 하지만, 금지한다고 거울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몰래 만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에서 몰래 수입을 하여 사용한 것이다.
이 <고려국조 거울>은 이러한 시기 틈새시장을 이용한 고려의 수출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