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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원히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 헤밍웨이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by 박소형

나에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고전이었다.

묘사하는 부분이 많으면 지루하게 느끼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노인과 바다만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대충 줄거리도 이미 알고 있는 데다 분명 묘사가 대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묘비명을 주제로 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 위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헤밍웨이의 묘비명을 알게 되었다.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오.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묘비명이라는 생각에 헤밍웨이가 궁금해졌다. 헤밍웨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여 최근에야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내가 상상한 <노인과 바다>는 외유내강의 모습을 한 어부가 망망대해 속에서 말없이 대어와 사투를 벌이다 결국 포획에 성공하지만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앙상한 뼈만 갖고 돌아온다는 어찌 보면 지루한 내용이겠지 싶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의 상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노인 산티아고는 외유내강이 아니라 한편으로 외강내유한 인물이었다. 강인한 외모를 가진 노인은 자신을 따르는 만올린이라는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며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청새치를 노리는 상어 떼를 쫓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결국 마을의 작은 항구로 돌아온다.



<노인과 바다>를 읽기 전까지 나의 상상 속의 헤밍웨이는 예민하고 유약한 모습이었다. 마치 헤르만 헤세처럼. 작가는 은연중에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는 마초 같은 산티아고와 비슷한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헤밍웨이의 삶은 말 그대로 남성적이었다. 유럽, 아프리카, 카리브해를 넘나들며 투우와 심해 낚시, 사냥, 권투를 즐기고 전쟁터를 누비며 군인으로, 종군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어릴 적 어머니와 좋지 않은 관계 때문인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끝에 마지막 네 번째 아내인 메리 웰시 헤밍웨이와 마지막 생을 함께 한다.



헤밍웨이는 즐기는 삶과 함께 글쓰기에는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서 글을 쓰는 특이한 작업 습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높이에 놓인 타자기와 독서대를 마주하고 오전 내내 서서 글을 썼다.



글을 쓰는 것은
사실 매우 간단합니다.
타자기 앞에 앉아서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모험가와 사냥꾼 기질이 있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그는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아버지의 죽음까지도 닮고 싶었던 걸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처럼 헤밍웨이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묘비명-016.png



글이 써지지 않은 괴로움 때문이었는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우울증 때문이었는지, 5명이나 자살한 가족력 때문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결정한 그의 죽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의 말이다. 헤밍웨이는 육체적인 파괴와 정신적인 패배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본인의 말처럼 외부 힘에 의해 파괴되거나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마지막 순간은 정신적으로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헤밍웨이의 삶과 안타까운 죽음을 알게 되니 위에서 언급한 유머러스한 묘비명이 진짜 헤밍웨이의 묘비명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나라 검색엔진에는 위에서 언급한 묘비명이 나오지만 외국 사이트에서 확인한 묘비는 화강암 석판 위에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1899년 7월 21일-1961년 7월 2일>이라는 간단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나온다. 헤밍웨이 묘비 근처에는 그의 청동 흉상이 있는데 그가 1939년 친구의 추도사를 위해 쓴 비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가을이었습니다.
면화 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들고,
송어 개울에 떠다니는 잎,
언덕 위로는 높고 푸른 바람 없는 하늘…
이제 그는 영원히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친구를 위해 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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