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에 따스한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그려낸 서민의 화가
윈터링이란 추운 겨울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P.5 – 캐서린 메이 >
지금 여기에 대한민국의 겨울이 왔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 많은 사람이 내란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지러운 정치 상황의 여파로 제2의 IMF가 오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경제도 위기 상황이다. 여객기 참사로 많은 분들이 원치 않는 이별을 맞아 가슴 아픈 슬픔의 터널을 통과 중이다.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 혹은 반복해서 차가운 겨울을 겪으며 좌절하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한다. 나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한류로 인해 세계적으로 문화적 위상이 높아져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우상향 곡선을 그릴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도 이처럼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현대사에서 우리나라의 겨울은 언제였을까?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 되는 을사늑약이 맺어진 1905년부터 1910년 본격적인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거쳐 1950년 6.25 전쟁까지 겨울을 겪었고 독재정권이 들어선 시기가 또 다른 겨울을 겪었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 즉,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금보다 더 막막한 그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살아갔을까. 지금은 그래도 겨울의 끝은 보이지만 그 시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한 희망도 사치라 여겨졌던 그 시절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화가가 있다. 바로 서민의 화가라 불리는 박수근이다. 그는 그 시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서민의 모습을 그렸다.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단발머리 누나, 앙상한 가지의 나무를 사이에 두고 아이를 업고 가는 여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 길가에 앉아있는 노인들 등 그 시절에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전혀 특별하지 않은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엔 너무나 평범한 모습들이었기에 그런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특별해 보인다.
박수근의 삶은 서민의 삶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의 겨울과도 같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부도나고 홍수로 인해 아버지의 논밭이 폐허가 되었다. 투병 중인 어머니를 대신해 장남으로 아버지를 도와 동생들도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강원도 산골 소년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리라는 꿈을 꾸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 입선을 목표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목표를 세우고 3년 만에 조선미전에 입선하였다. 이후 박수근은 조선미전이 끝나는 1942년까지 거의 매년 출품하였다.
하지만 입선만으로 화가로 살아갈 방법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첫눈에 반한 이웃집 처녀 김복순과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미게 되어 화가가 아닌 평안남도 도청의 서기로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나간다. 8.15 해방으로 38선이 그어지면서 도청 서기직을 버리고 아내가 있는 금성으로 돌아와 중학교 미술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다 6.25 전쟁이 일어나 셋째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고 1.4 후퇴 때 홀로 남하하여 우여곡절 끝에 그리운 가족을 만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수근은 미 8군 PX에서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소설가 박완서이다. 미군의 초상화를 주문받는 일을 했던 20대의 박완서가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을 만난 것이다. 박완서가 글을 쓰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박수근이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 주인공 화가의 실제 모델이 박수근이다.
이후 휴전이 되고 새롭게 생긴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하여 화가로 인정받기 시작하지만 1957년 국전에서 낙선하자 크게 실망하여 슬픔에 빠져 폭음하는 일이 잦아졌다. 생계를 위해서 반도 호텔 안에 있는 화랑에서 그림을 팔았는데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들이 그의 그림을 구입해 갔다.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외에도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미술계에서도 박수근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959년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어 매년 심사를 거치지 않고 국전에 출품할 수 있었다. 이후 타계할 때까지 국전에 출품하고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된 과음에 신장과 간이 나빠져 몸이 붓기도 하고 왼쪽 눈에 백내장이 와서 수술을 하였으나 결국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모네처럼 박수근도 한쪽 눈마저 흐릿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오직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1965년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인생의 혹독한 겨울을 지날 때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겨울이었던 시기에 따스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그림으로 남겨준 박수근 화백에게 가슴 뭉클한 감사함을 느낀다. 소설가 박완서의 시선처럼 그가 그렸던 앙상한 나무는 죽어버린 고목이 아니라 새로운 잎이 돋아날 수 있는 나목이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 박수근의 인터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