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 무한우주론을 주장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Q1. 조선시대에 시대를 앞서간 우주 전문가였던 이 인물은 집 마당에 직접 관측소를 만들어 달과 별을 관찰할 정도로 우주의 신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동양인 최초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우주론을 펼쳤는데요,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 불리는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2년 전쯤 유퀴즈온더블럭 프로그램에 나왔던 퀴즈다. 당시 출연했던 외계인을 찾는 전파 천문학자인 이명현 박사는 정약용이라고 오답을 말했다. 모두의 짐작대로 정답은 바로 담헌 홍대용이다.
담헌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의산문답>과 <담헌서>의 저자라고만 알고 있었는 데 그를 다시 만난 건 지난 달에 읽었던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에서 북경의 유리창을 주제로 쓴 글에서 였다.
당시 연경이라고 불리던 북경에 외교 사절단으로 참여한 담헌이 항주에서 온 세 학자 엄성과 반정균, 육비를 만나 천애지기로 친분을 쌓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나이와 국적을 개의치 않고 시와 학문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홍대용이 귀국한 후에 엄성은 병에 걸렸는데 병석에서도 홍대용에게 받은 글을 가슴에 얹고 그리워하다 선물로 받은 조선 먹의 향기를 맡으며 세상을 떠났다. 엄성의 임종 장면을 적은 서신을 받은 홍대용은 애도의 글을 써서 보내 홍대용과 엄성의 아름다운 우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귀국한 뒤 담헌은 연경 여행기인 <을병연행록>과 청나라 지식인과 우정을 쌓고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한 <회우록>을 남겼다. 담헌의 글은 당시 조선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담헌을 따라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갔고 연암 박지원도 청나라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후에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 김정희도 연경에 다녀온다.
담헌 이전에도 연경에 다녀온 사람은 많았지만 오랑캐라 여겨지던 청나라 학자들을 벗으로 삼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류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로 인해 담헌은 조선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를 따라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는 일이 늘어났고 청의 문물이 신기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북학파가 형성된다.
사실 담헌은 18세기 조선의 지배 세력이던 노론계의 명문 집안 출신으로 당시 노론의 거두 김원행의 제자가 되어 최고 수준의 유학 공부를 하였지만 때로는 소론의 입장에서 노론을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자명종을 만드는 나경적을 만나 함께 혼천의를 제작하면서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접했고 혼천의를 완성하였다. 혼천의 제작에 가장 큰 후원자는 담헌의 아버지 홍력이었다. 당시 혼천의 제작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일이었지만 많은 비용을 대주었고 후에 작은 아버지 홍억을 따라 담헌이 연경에 갈 때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담헌은 자신이 공부한 천문학을 근거로 <의산문답>을 저술한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청나라를 통해 알게 된 서양 과학 개념을 바탕으로 땅이 둥근 공 모양이라는 지구설, 지구가 하루에 한 번 자전하는 지전설, 우주가 무한하다는 무한우주설, 다른 별에도 지구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 즉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다세계설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외계인에 관한 상상은 절친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도 남아있다. 청나라를 방문했던 연암은 추석날 밤에 청나라 학자들과 달을 보면서 저 달 속에 지구를 쳐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달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독특한 생각을 글로 남겼던 담헌은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한다.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한양으로 급히 돌아왔으나 정작 그 자신이 쉰 셋의 나이로 중풍으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벗 연암이 나서 장례 절차를 주관하고 연암은 담헌의 묘지명을 쓰며 몹시 슬퍼했다.
장례를 마친 연암은 거문고를 잘 탔던 담헌이 그리워서 였는지 집에 돌아와 거문고와 가야금같은 악기들을 모두 남에게 주고 더 이상 음악을 연주하지도 즐기지도 않았다.
연암은 달을 보며 달 사람이 된 담헌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