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유대인, 아우슈비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의 증언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몇 해 전에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선물 받았지만 초반에 읽기를 포기했다. 아우슈비츠의 진실은 너무나도 참혹했기에 끝까지 읽기가 고통스러웠다. 저자가 겪었던 고통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프리모 레비의 책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숙제처럼 책꽂이 한 켠에 무심하게 꽂혀있었다.
그 책을 선물했던 분이 이번에는 프리모 레비의 다른 책인 <주기율표>를 독서 모임에 추천하여 리더를 맡았다. 이번엔 정말 피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읽기 시작하였지만 프리모 레비의 책에 대한 그리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이었는지 첫 번째 장부터 공감이 쉽지 않았다. 화학 지식이 전혀 없어 주기율표의 원소 이름을 따서 구성된 각 장의 제목은 나에게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책에 대한 나의 감정은 반전되었다. 화학자인 저자가 각 장마다 제목으로 사용한 특정 원소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 혹은 소설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화학 원소와 그의 인생 사이의 연결고리가 흥미로웠다. 원소의 화학적 특성을 자신이 살아온 삶의 특정 시기나 경험에 비유하며,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이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 저자가 유대인으로 차별받았던 경험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이 담겨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원소와 연결되어 더욱 강렬한 의미로 다가오면서 니체의 명언이 떠올랐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화학이라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상황을 경험한 저자는 인간의 본성과 시스템화되어 있는 사회 문제 등을 지적하면서 읽는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가 묵직하게 던지는 질문 덕분이었는지 몇 년 전에 읽다 만 <이것이 인간인가>도 함께 읽어 나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장은 바나듐이다. 저자가 아우슈비츠에서 화학 시험 과정을 거쳐 수용소 실험실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실험실에서 만났던 독일인 뮐러를 회사 업무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만났었지만 지금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독일인의 입장을 듣고 싶어서였을까. 저자는 독일인 뮐러에게 자신이 쓴 책과 편지를 개인적으로 보내면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결정적으로 뮐러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르는 동안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한다.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편안한 과거를 진심으로
성실하게 구성해 냈는지도 모른다.
- 주기율표 319p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는 데 그런 전형적인 독일인이 바로 뮐러였다.
저자는 뮐러와의 만남을 통해서 극적인 역사 속에서 드러난 인간의 본성과 용서와 이해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뮐러를 직접 만나기로 하지만 8일 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만나지 못했다는 마무리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여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저자의 섬세한 내면의 묘사와 솔직함에 묘한 여운이 남는 장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포로 생활이 글쓰기로 이어져 증언 작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과거가 자신을 더욱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게 해 주었다고 말한다. 고난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기회가 된다는 결론에 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인지 리더 선배님이 말씀하신 힘들었던 일이 성장의 기회가 되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더 크게 다가왔다.
대부분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선배님들이 많아서였는지 아이들을 키워나가며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둘째를 키우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의 동요를 조절하게 되었고 내공을 쌓아가고 있다는 선배님, 아이들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고 있다는 선배님과 아이들을 보면서 나의 오만함을 버리게 됐다는 선배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니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듯했다.
나의 터닝포인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경험했던 큰 수술이었다. 그 사건은 수동적으로 살고 있었던 삶을 적극적인 배움이 있는 삶으로 변화된 계기였다. 당시에는 마치 세상의 슬픔을 혼자 안고 있는 사람처럼 눈물로 하루를 보냈고 타인에게 나의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나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가족에 대한 희생이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살아온 나의 삶에 미안한 감정이 들어 나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고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관심 있는 강의를 들으며 나 자신을 찾기 위해 헤매다 보니 방법은 책에 있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어떤 상황이나 사실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는 반전의 의미와 불리한 조건을 가정하고 있지만 결국에 해낸다는 성공의 의미, 그리고 자신과 다른 입장의 주장이나 사실을 인정하거나 양보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선배님들은 아이 키우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성장하는 기회로 삼았다. 나는 병에 걸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나의 삶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글을 쓰고 관조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런 배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또 한 번의 반전 있는 삶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한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해준 그에게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