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좋은 인생에서 나온다. 좋은 제품도 좋은 모티브에서 나온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대학교 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책을 보는 안목이 없던 나는 베스트셀러를 주로 읽었는데 그 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베스트셀러였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유홍준 교수님의 따뜻한 시선과 유머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음미했던 느낌만 남아있었다.
그 기억으로 유홍준 교수님의 최신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를 이번주 새벽 온라인 독서 모임(새온독) 책으로 선택했다. 교수님의 책을 그동안 읽지 않아서 선택하고 나서 불안하기도 했다.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는 약 40권 가량 출간되어 500만부의 밀리언셀러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교수님의 인생사를 적은 책이다. 교수님의 인생과 문화, 답사 여적, 예술가, 스승과 벗에 대한 에피소드와 생각들에 대한 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데 부록으로 글쓰기에 대한 조언까지 담겨 있다.
담배에 대한 고별사를 마치 애인을 보내는 한 장면처럼 서술한 글과 보잘 것 없는 잡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글을 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교수님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통문관 옛주인 이겸로 선생에 대한 글에서 이겸로 선생의 말씀을 문장으로 옮긴 부분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내가 돌봐주던 낡은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젊은 시절 내가 돌봐주던 어떤 일들이 노년의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독서 모임 선배님들과 이 질문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독서 모임 회원님들답게 독서와 공부, 글쓰기라고 말씀하셨고 자녀들이라고 답하신 분들도 있었다. 나 역시 아이들을 돌보며 아이들에게 힘을 주려고 나누었던 대화들이 노년에는 오히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힘을 얻을 거라 생각했다.
교수님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시선이 담긴 글 중에서는 한국미의 영원한 아이콘, 백자 달항아리가 인상 깊었다. 완벽한 기교가 주는 꽉 짜인 차가운 맛이 아니라 부정형이 주는 여백의 미를 가진 달항아리를 다시 보게 되었다. 달항아리는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는 미적 가치가 있기에 한국의 브랜드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는 프랑스 석학의 이야기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우리 문화유산인 달항아리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다.
새온독에서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를 담당하고 있는 한 선배님이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하여 디자인된 유제품이 바로 빙그레 바나나 우유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에 내가 빙그레 김호연 회장이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이신 김미 관장과 결혼하여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좋은 캠페인을 많이 한다는 말씀을 드리자 빙그레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인증샷으로 올리신 선배님 덕분에 선한 영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즐거운 일도 있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기대하고 읽어나갔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그런데 책의 뒷부분에서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울림을 만났다.
바로 제5장 <스승과 벗>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 온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분들. 그리고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에서 그분들을 기리는 추도문 형식의 글을 모아 놓은 장이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분들이었다. 리영희, 백기완, 신영복, 홍세화, 김민기 등 교수님이 이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계신 것도 놀라웠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있지만 솔직히 어떤 삶을 살아가신 분들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는 데 이 책으로 더 알고 싶은 분들이 많아졌다.
유홍준 교수님은 이런 분들과 사적인 인연을 맺고 먼 길 가실 때까지 곁을 지켜주셨던 따뜻한 분이셨다. 당시 시대적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셨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시대의 스승이라고 할 만한 많은 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고 끝까지 그 곁을 지키셨던 교수님의 모습에 큰 울림이 있었다. 젊은 시절 나의 서툴렀던 인간관계가 떠오르며 좋은 인연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책을 끝까지 함께 읽은 선배님들과 오늘 이 책에 대한 총평을 나누었다. 결혼 주례를 서주시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신 대학교 교수님이 생각난다는 선배님, 초등학교 때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손 편지에 써서 반 아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신 예쁜 선생님이 생각난다는 선배님, 유홍준 교수님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 줄 몰랐고 인간적으로도 훌륭하신 분이라는 선배님, 좋은 책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준 책이라고 하신 게으른 완벽주의자 선배님, 이 책을 읽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나를 쌓아가는 일이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선배님, 약간 윗세대이긴 하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유홍준 교수님의 책을 읽다보니 대학교 시절이 떠올랐다는 선배님. 같은 책을 읽었지만 모두 다른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개인적으로는 시대적 소명을 잃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촘촘하게 살아오신 유홍준 교수님의 삶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결국 좋은 삶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과 함께 나 역시 그런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 나온 이생진 시인의 시가 그런 삶이 아닐까.
풀 되리라 / 이 생진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