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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 김훈

늙기의 즐거움 그리고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 연결하기

by 박소형

지난주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유홍준 교수의 에세이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에 이어 이번 주도 에세이를 읽었다. 에세이 Essay는 프랑스어의 'Essai 시도, 경험'에서 유래되었다. 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쓴 <수상록 Essais>을 출판하면서 에세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몽테뉴의 에세이는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에세이는 문학의 한 장르가 되었다.



에세이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글쓰기 방식이다.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책을 출간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에세이로 도전하고 있다.



이렇게 에세이가 너무나 흔해져서 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에세이를 읽지 않아서 였을까. 솔직히 에세이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에세이를 연달아 읽다보니 장르가 아니라 누가 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주 책을 읽고 이런 나의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그 책은 바로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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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김훈 작가님의 소설만 읽었고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만 보아서 였는지 김훈 작가님 하면 친근함보다는 경외감이 먼저 떠올랐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다 보니 나 혼자만의 친분이 생긴 것만 같았다. 특히 작가님과 같은 일산에 살고 있는 독서 모임의 선배님이 일산 호수공원에서 작가님을 만나는 순간을 위하여 이 책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말씀에 친분을 만들 수 있는 연결고리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김훈 작가님의 다른 에세이도 많이 읽어왔던 리더 선배님은 평소에 작가님의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를 좋아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셨다. 역시나 좋은 문장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런 문장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나의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산과 물은 서로를 범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제 갈 길을 가는 데
제 갈 길을 가면서 더불어 간다.

허송세월 p.96



이 책은 늙기의 즐거움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노년의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을 한다고 표현한다. 좋아했던 술과 담배에 대한 단상과 자연과 사물의 세심한 관찰,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특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경험담, 푸르게 빛났던 역사 속 인물들을 향한 청춘 예찬,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바라본 이 세계의 불완전성, 인생을 살아오면서 맡았던 냄새의 기억들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통찰력이 제 갈 길을 가면서 아름다운 문체와 함께 더불어 간다.



노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인지 이 책을 읽고 노년에 접어든 자신의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는 리더 선배님, 명절 때 유년기부터 6.25 피난 이야기까지 들려주셨던 시아버님이 생각난다는 선배님, 나이 듦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씀해주시는 젊은 선배님도 있었다.



“한때는 최신 디지털 기기였지만 이제는 사라진 기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리더 선배님의 질문에, 밝은 목소리의 선배님은 아버지가 사주셨던 삐삐가 생각났고, 은은한 목소리의 선배님은 아버지가 사우디에서 사오신 라디오가 기억에 남고, 독서 모임 회장님은 청춘을 함께 한 워크맨을 한참 동안 버리지 못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허송세월 p.284



이 세계가 불완전한 이유는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을 논하지 마라 " 라는 인디언 격언을 인용하며 연륜 있는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고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수근거림과 와글거림이 덜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향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연결하기 위한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가는 언어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 중이다.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겠지만,
저는 생활을 통과해 나온 사소한 언어로 표현되는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언어는 훨씬 더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송세월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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