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꾼 여행가, 체 게바라
여행은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준비하며 상상하는 즐거움과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즐거움이 그것이지요. 열흘 정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에서 만나는 새로운 경험도 좋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좋아”라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한 집에서 칼칼한 한식을 먹으면서 쉬고 싶다는 바람으로 집에 도착했습니다.
열대야가 지속되는 여름이었기에 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 모든 바람이 사라졌습니다. 냉장고도 무더위에 지쳐 더운 날씨에 항복한 건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면 환하게 환영해 주는 빛도 사라지고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냉동실을 열어보니 쟁여놓았던 다양한 식재료들이 이미 전사한 후 악취만 풍기고 있었습니다.
여행 가방을 던져놓고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을 부정하고 싶고 냉장고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필 여행 기간 중 고장이 나서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는 건지 냉장고가 밉기만 했습니다. 냉장실에 있던 여러 반찬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냉동실에 있던 고기와 해산물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즐거운 여행의 마무리는 집이 주는 편안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냉장고 청소라는 힘든 가사노동을 시작했습니다. 냉장고의 귀한 음식들이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음식물을 다 버린 후에는 담아놓았던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냉장고 안을 깨끗하게 다 닦아내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몸은 피곤한데 점점 냉장고 정리가 되어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이런 상황이 일어난 덕분에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냉동실에 쟁여놓는 습관도 돌아보게 되어 먹을 만큼만 식재료를 구입하고 바로 요리해서 먹고 많이 있는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여행은 한 사람의 운을 바꿀 수 있다는 현지 가이드 말씀도 떠올랐습니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마무리까지가 여행의 과정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나의 운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쩌면 여행 중 냉장고가 고장 난 것은 그저 불운한 상황이 아니라 현명한 식자재 관리와 좋은 식습관을 가져오는 운이라고 말이죠. 여행을 통해 제가 운이라고 이름 붙인 이런 작은 변화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여유로운 공간의 냉장고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요.
여행은 이처럼 운을 바꾸기도 하고 심지어 운명까지 바꾸기도 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의사를 꿈꾸며 의대를 다니던 23세의 젊은이가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 중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농장의 인부들과 빈민가의 사람들을 보며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서 그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안정적인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혁명가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칭했던 체 게바라입니다.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과테말라에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자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합니다. 자신이 가진 의학 지식을 활용해 과테말라 진보 정부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지만 우익 쿠데타가 일어나자 총을 들고 저항하다 체포되었다가 멕시코로 탈출하였습니다.
멕시코에 망명 당시 멕시코시티에서 쿠바 혁명을 준비하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납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쿠바 국내로 진입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군을 무너뜨립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의 시민이 되어 국가농업개혁 연구소의 산업부장과 쿠바 국립 은행 총재 및 공업 장관을 역임하면서 쿠바 정부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 안정적인 직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혁명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 콩고로 가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세계 혁명은 아직 너무 먼 꿈이었을까요. 콩고에서 한계를 느낀 그는 쿠바로 잠시 돌아왔다가 볼리비아 밀림에서 2년 정도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미국이 지원하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여 3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 제도가 없어 대외적으로는 체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합니다. 그를 사형시킬 때 병사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억지로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하여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는 처형 직전, 사형 집행을 주저하는 병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분류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여행자는 사람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로 단순한 여행자입니다. 이보다 한 단계 위의 여행자는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단계는 관찰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체험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단계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여행자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집에 돌아와 자신의 삶에 반영하고 확장하는 여행가입니다. 니체는 가장 높은 단계의 여행자는 내면적으로 배운 것을 남김없이 발휘해서 살아가는 행동가라고 말합니다.
니체의 분류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가장 높은 단계의 여행가이자 행동가가 아닐까요. 나는 과연 어떤 단계의 여행가인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서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새로운 여행지를 꿈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