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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형 Oct 12. 2024

하늘은 나를 곱게 다듬으려 했다

다산 정약용 묘지명의 한 문장_天用玉汝 천용옥여

어릴 적 어느 날, 어둑어둑한 새벽 즈음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전날 저녁을 맛있게 드시고 늘 그렇듯 일찍 잠드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노환으로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은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 시절답게 집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동네 어른들과 친지들의 방문으로 집 안이 무척 좁아 보였습니다. 마루에서 어른들이 할아버지의 염을 하는 모습을 마당에서 지켜보았던 기억도 남아있습니다. 그 모습이 제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죽음이었습니다. 호상이라는 어른들 말씀과 죽음을 알지 못한 어린 마음이어서였을까요, 그때 그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은 커다란 슬픔보다는 자연의 순리였습니다.     


몇 해 전 경험한 죽음은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가족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던 남편 절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실종된 후에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던 상황이라서 죽음은 자연의 순리보다는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동안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망자와 공유했던 행복한 추억의 공간은 슬픔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뉴스에서 접하는 3인칭의 죽음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인 2인칭의 죽음을 통해 1인칭의 죽음 즉, 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통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종교에 의지하거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예술작품을 남기기도 합니다. 필멸하는 인간의 생에서 불멸하고 싶은 다양한 현상들이겠지요.     


무덤 안에 넣는 묘지명이나 무덤 밖에 세우는 묘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육신은 사라지지만 자신의 일생이나 생각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으로 스스로 묘지명이나 묘비명을 남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직접 쓴 묘지명을 자찬 묘지명이라고 하는데 스스로 남기는 마지막 말이니 자신의 일생을 압축한 내용이나 인생철학의 정수를 담은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까지 다다르자 생전에 저서를 많이 남긴 분들의 묘지명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많은 역경에도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의 묘지명은 과연 어떤 문장일까라는 가슴 뛰는 질문에 몸과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집에 있는 다산 관련 책으로는 부족해 도서관과 검색창을 이용하여 찾아낸 다산의 자찬 묘지명 중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 무덤은 집안 뒤란에 있는
자좌(子坐)의 언덕에 정했다.
부디 바라던 바와 같게 되었으면 한다.
명은 이렇다.     


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안고
궁궐 깊은 곳에 들어가 모셨으니
참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하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아
못난 충심(衷心)을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받아들여주셨고
육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오묘하게 해석하고 은미한 데 통했네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
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
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
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울리리라.  
  
정약용, ‘자찬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다산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회갑을 맞았습니다. 이때 다산은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데 거의 책 한 권과 맞먹는 방대한 분량으로 자서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문집에 실을 집중본과 무덤에 함께 묻을 광중본으로 나누어 묘지명을 작성했는데 집중본은 장문의 글로 자신의 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하였고 광중본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이후 14년을 더 살았지만 몰락한 집안과 건강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 다산을 밀어낸 권력자들이 그의 일생을 왜곡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다산은 묘지명에서 자신이 겪은 고난을 ‘하늘이 곱게 다듬으려고 했다’라고 표현하면서 유배지에서 소명을 찾아 집필한 500여 권의 책들을 ‘아득하게 멀리까지’ 후세에 남겨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묘비명에 적어서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나의 묘비명을 어떤 문장으로 남겨야 할지 생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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