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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형 Sep 20. 2024

내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 세상에 외치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 노비 만적

어찌 보면 세상에 당연함이란 없습니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 속에는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습니다. 편안한 옷을 입고 두 발로 걸어 회사에 출근하는 일상에서부터 신분제가 없는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런 일들은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많은 이들 덕분입니다.


유인원과 인간의 차이를 만들어 냈던 직립 보행은 두 발로 걷기를 선택한 용기 있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노력 덕분이고 겨울에 따뜻한고 편안한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삼베를 입으며 겨울을 지내기에는 너무 추웠던 고려시대 백성들에게 따뜻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덕분입니다.


갑오개혁 때 폐지된 신분제는 당시 농민들이 목숨 걸고 참여한 동학농민운동의 폐정개혁안이 반영된 결과이며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분들이 일제의 폭압에서도 용기 있게 세상에 대한독립을 외쳤던 결과이고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와 독재정권에 항거한 결과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닙니다. 그 당시에 당연하지 않은 일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있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고 그 생각의 변화가 행동으로 이어져 결과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많은 시도 중 하나였던 만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분제라는 낡은 질서를 무너뜨린 프랑스혁명보다 600여 년이나 앞 선 고려 신종 원년이었던 1198년에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은 노비해방을 꿈꾸며 품고 있던 문장을 세상에 이렇게 외칩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


당시 최충헌은 고려 최고의 권력자였고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무신정변 이후 이의민과 같은 천민 출신 권력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노비들을 불러 모아 거사를 계획합니다. 그때 한 말이 바로 왕후장상 영유종호 王侯將相 寧有種乎입니다.






이 말은 만적이 처음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사마천의 <사기> 진섭세가에 나오는 문장으로 진나라 때 최초로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이 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호해가 즉위했던 시기에 빈민들을 변방 근처의 땅으로 옮기도록 했는 데 이때 진승과 오광이 이들을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비로 도로가 무너져 기한 내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참수를 당하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 것보다 난을 일으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모아놓고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에 폭정에 시달린 사람들이 진승과 오광의 난에 동참합니다.




만적은 평소에 품고 있던 이 말을 동료 노비들에게 들려주고 그의 말에 노비들이 동조하자 만적은 그들에게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丁 (장정 정)를 새겨 나누어줍니다. 丁 장정 정은 양인이라는 뜻으로 천민이었던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싶은 꿈을 표현한 글자였습니다.


1198년 5월 17일 흥국사에서 봉기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수천 명이 모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막상 그날 모인 사람은 수백 명 밖에 되지 않아 4일 후인 21일 보제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니다.

하지만 함께 참여했던 노비 순정의 밀고로 노비해방이라는 만적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순정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율학박사 한충유에게 반란 계획을 고하고 한충유는 다시 최충헌에게 고해바쳤습니다. 최충헌은 만적과 반역 모의에 가담한 노비 100여 명을 잡아 포대에 씌어 강물에 던지라고 명합니다. 노비가 없는 세상으로 바꾸려 했던 만적은 그렇게 동료 노비의 배반으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만적을 밀고한 순정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그의 주인인 한충유도 공로를 인정받아 합문지후 직에 제수되었습니다.






비록 만적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라는 신분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용기 있게 품고 있던 문장을 꺼내 들어 세상에 외친 모습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만적이 노비가 아닌 혁명가의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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