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율 Nov 01. 2020

6) 슬기롭게 임신기간을 보내는 법



고생스러운 초기의 나날들을 어느정도 보내고 나자,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다. 


중기가 되면서 나는 조금씩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초기보다, 중반의 이 시기가 나에게는 훨씬 편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밤이를 위한 물품들을 사 들이기 시작했다. 


밤이를 위한 쇼핑이 꼭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즐거운 일이 되었다. 마침 시기도 크리스마스였겠다. 아기예수를 맞이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으로,나 역시 그렇게 아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난생 처음 아기 옷을 샀다. 백화점엔 아기를 위한 브랜드가 늘어서 있었다. 


그 중 나는 한 곳으로 들어가 하늘색 내복을 하나 골랐다. 사이즈는 80. 더 작은 걸 살까 했지만, 아이는 금방 큰다는 직원의 친절한 말에 80사이즈를 선택했다. (※당시의 난 80사이즈의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갓난 아기는 생각보다 아주 빨리 자랐고, 80사이즈는 생각보다 긴 시간 입힐 수 있는 적절한 사이즈였기 때문이다.) 


색깔은 하늘색이라기엔 조금 탁한데, 민트빛에 더 가까운 옷이었다. 같은 디자인의 핑크색 옷도 나란히 걸려있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민트색을 골랐다. 아직 성별도 알지 못했고, 설령 딸이라고 해도 핑크색 옷은 고르고 싶지 않았다. 이건 특별히 이유는 없는 내 고집인데, 이상하게 아이 옷중에는 핑크색에 손이 가질 않았다. 여자아이=핑크색이란 무언의 공식에 대항하고자 하던 작은 몸부림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내가 밤이에게 사준 옷들 중 핑크색은 거의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밤이의 옷을 사고선 한창 들떴다. 신기한 게, 내가 입을 옷이 아닌데도 꼭 나에게 선물한것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내 손에 들어온 ‘새 물건’이라서였을까. 마음 속이 새것으로 풍성하게 가득차는 느낌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틈나는 대로 밤이의 물건을 사들였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사야 할 아이의 물건은 많다 못해 차고도 넘쳤다. 유모차나 아기 침대 같은 큰 물건부터 천 기저귀 거즈수건 같은 소소한 것들까지. 맘 카페에는 출산 전 준비해야 하는 아기용품 리스트들이 여기저기에 올라와 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내가 필요한 물건들을 다시 추려서 리스트를 짜야 했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밤이를 맞을 준비를 이어나갔다. 






하루는 코엑스에서 베이비페어가 열려 신랑과 함께 갔다. 1년에 한 번, 가장 큰 규모의 박람회라 그런지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미어 터졌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나와 신랑은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참가 기업들이 주는 '공짜' 물품들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두 손가득 분유, 손수건, 기저귀 꾸러미를 든 채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사람들이 유난히 모여있는 무리가 보였다. 


"누구야?" 


나는 신랑과 함께 무리 속에 합류했다. 곧 이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는 아빠와 아이가 등장했다. 아!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그 아이는 윌리엄이었다. (그 시기에는 아직 벤틀리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샘과 윌리엄, 둘만 있었다.)


TV에서만 봤던 윌리엄을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으로 너무너무 예뻤다. 인형같다는 수식어가 온전히 어울리는 아이였다. 피부는 뽀얗고 눈도 보석처럼 크고 반짝반짝 빛났다. 아빠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단번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멀리서 힐끔 보던 사람까지도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와. 진짜 예쁘다. 귀여워. 진심이 섞인 그 말들에 나는 격하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은 정말로 예뻤으니까.


그저 TV에서만 봤던 남의 아이도 이렇게나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이제 조금 있으면 태어날 내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싶었다. 나는 매일매일, 배에 손을 올리곤 아이의 얼굴을 상상했다. 우리 밤이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갔다. 베이비페어에 다녀온 이후로 나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애청자가 되었다. 거기에 나오는 예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열심히 기도했다. 우리 아이도 여기 나오는 아이들만큼 예쁘게 해주세요. 그렇게.


-뭐, 나중에 보니 알겠더라. 우리 세상에 나온 밤이는 너무나도 예뻤다.  이렇게 예쁜데 뭘 그렇게 간절했나 싶을 만큼,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임신 기간동안 시간이 많았다. 일단 나는 당시에 회사를 다니지 않았고, 초반엔 유산기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집에 있었으니까. 임신 초기엔 입덧때문에 누워만 있었지만, 중기로 진입하면서부터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MBTI 결과 E의 극단에 서있던 나로서는 집콕 생활이 영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 가지 정도, 밖에서 해야 하는 일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요가. 

최대한 조심하면서 초기 내내 움직이지 않았더니 몸이 금방 둔해졌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스트레칭과 요가는 내게 제법 활력감을 가져다 주었다. 배가 아직 많이 나오지 않았던 시기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가는 겸사겸사 바깥 공기도 마시고 몇 마디나마 다른 예비 엄마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두 세달 정도 되는 짧은 기간, 나는 이 시기에 요가를 해서 아주 좋았다.



두 번째는 글 쓰기와 그림그리기. 

노트와 펜을 들고 카페로 갔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하거나, 그게 싫으면 끄적끄적 낙서를 했다. 잘 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그냥 했다. 이 활동의 목적은 '잘한다'가 아니라 '쓰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난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조각들을 끄집어내 노트에 정리하고, 안 풀릴 때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그렸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 동안 내가 그린 낙서는 흘러가는 시간을 한입한입 베어먹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낙서하고 생각하는 동안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었다. 


그렇게 나온 플롯을 모아 어떤 사이트에 연재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반응이 보이는데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것을 원동력 삼아 나는 열심히 연재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서 완결을 냈다. 글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정말 경험해 본 이들만이 알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마쳤을 때의 그 희열감과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했다. 이래서 글을 쓰는구나 싶었지.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뭐든 쓰는 거겠지?


어떤 날은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그간 내가 적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정리했다. 정리도 귀찮으면 그냥 보면 된다. 눈으로, 혹은 입으로 읽어내려가면서 이걸 썼던 날의 감정을 되짚었다. 그러면 문장 속에 숨어있던 그 날의 감성이 확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걸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는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 만나기.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이었다. 


“잘 지내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우리 밥이나 한번 먹자.”


그러면 친구들은 대부분 반가워 하면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반가워 하지 않는다면 뭐, 안 만나면 그만이지.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내가 바쁘게 살았던 만큼,  친구들 역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회사 일이나 관심사 같은 것들을 주제로 많이 말하는 편이었다. 내 친구들 역시 나와 같은 -덕후-들이라(…) 평소 자신들이 덕질하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정말 시간이 잘 갔다. 나도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 서로 얘기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열띤 토론의 장이 된다. 토론이라고 해서 어려운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 준기배우님이 이번 드라마에서 얼마나 멋있게 나왔는지 알아? 이거 이번 드라마에서 나온 짤인데 한번만 봐봐.”

“오! 분위기  장난 아니다! 나도 이번에 한번 봐야겠네. 난 최근에 마블 신작 봤는데 거기서 모 배우가…”

“맞아맞아! 아, 스포는 하면 안되지. 아무튼 그거 완전 대박이었어.”


식의 내용들이다. 같은 관심사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수가 있었다. 꼭 덕질을 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이야기의 주제는 무궁무진 하니까. 덕질을 하지 않는다면 일상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도 얼마든지 좋다. 나는 그렇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근차근 시간을 보냈다. 


문화센터에 가 보면 예비 엄마들을 위한 강좌가 제법 많이 개설되어 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꼭 요가 뿐 아니라 아이를 위해 손수 베넷저고리를 만든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아니면 육아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든지, 이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무엇이 되었든 마음을 편하게 먹고 하나씩 해 본다면 어느덧 아이를 맞이할 시기가 성큼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이전 06화 5) 미친 입덧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