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마법사 드로셀마이어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눈이 건조해서 침침해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로 마법사는 공중으로 날으며, 한 손에 소중히 모아쥐고 있던 눈가루를 무대 아래로 뿌렸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극장을 메운 어른들은 모두 아이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물론 아이들도.
눈가루는, 눈은 충분히 제 아름다움을 뽐내며 하늘하늘 마술사가 원하던 만큼의 속도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떨어지며 환상을 보고 싶어 하는 많은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성공.
그날 환상을 보여준 것은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 클라라도 마법을 보여주었는데, 인형을 품에 안고 뛸 듯이 기뻐하던 땋은 머리의 어린 소녀가 빨간 커튼 뒤로 뛰어 들어갔다가 나오자 한순간 다 큰 늘씬한 처녀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에 소녀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는 극의 진행을 위한 허용이었겠지만 그 짧은 순간은 내가 실제로 체감하는 세월의 흐름과 비슷했다. 내가 느끼기에 어린 소녀가 커튼 뒤로 뛰어가 성인 무용수에게 손짓을 보내고, 성인 발레리나가 이제 내 순서라는 마음으로 쿵쿵 토슈즈로 무대 바닥에 노크 하며 수면 위로 나아가듯 가리 워진 커튼 너머 몇천의 눈동자들 위로 다이빙하는 그 찰나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하는 체감시간과 동일한 것 같았다. 정말 한순간에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었고, 물론 그리 늘씬하지는 못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고, 그러나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에는 여러 가지로 지친 그런 중년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게 당신의 이야기다.
그렇다. 우리는 싼타를 믿고 싶은 어른이기에 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집에가서 잠에 들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 심지어 차가 끊기는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와인바라는 어른스러운 공간으로. 강남역12번 출구에서 100m떨어진 가게. 간판을 발견하고 지하2층 정도 깊이의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 고급진 이름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와인바에 도착하자 마법사를 닮은 웨이터가 우리를 빨간 커튼 뒤의 고급진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은 꼭 무대 같았다. 그러나 새로이 시작한 무대에서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배우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듯 했다. 우리는 공연장에서 발레리나처럼 아이에서 어른으로 완벽하고 깔끔하게 변신하지 못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콜라를 시켰고, 구색을 맞추려 하이볼을 시키긴 했다. 또한, 리조또와 스테이크를 퍼먹다가 대중교통이 끊길까봐 서둘러 나왔다. 내일도 출근이라는 전광판이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까닭이었다. 어른이 되다만 두 명의 어른은 그렇게 다음을 기약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검색하자 온갖 종류의 스노우 볼이 나왔다. 서점, 아트 샵 등 예쁜 것을 파는 곳을 둘러보면 유리 또는 플라스틱 안에서 끝없이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 스노우볼들이 메인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직원이 없는 매대에서 나도 모르게 스노우볼로 손이 향했다. 사각형의 스노우볼을 흔들자, 플라스틱으로 된 싼타모형은 슬로우 모션처럼 반 박자 느리게 꿀렁이는 글리세린 사이로 곤두박질 쳤다. 문득 내 철없는 행동에 싼타가 타고 있는 썰매 뒤편의 선물꾸러미가 다 젖었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싼타의 숭고한 업무를 방해한 것 같다는 죄책감에 빠지려는 찰나 싼타와 선물박스들은 갑작스레 어색하지만 당당하게 원래의 위치로 우뚝 솟으며 돌아왔다. 그렇다. 오늘은 이브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는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내 방에 쳐진 커튼 사이로 밤거리의 가로등이 보이고, 그 가로등이 비추는 밝은 곳에서 내리는 중인 눈이 보인다. 빠르고 소리없이 재빠르게, 싼타가 선물을 준비하듯 은밀하게 내린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서 거리를 내다보자 이미 그곳은 스노우볼 안의 마을이 되었다. 문득 생각에 잠긴 찰나의 순간에, 내가 어른이 되던 바로 그 순간에 그곳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커튼을 활짝 걷고 공연에 더 집중해서 즐기기 위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시간이 흐르자...어쩌면 공연은 내 쪽에서 하는 중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튼을 걷은 내 방안이 무대였던걸까? 일에 만성피로에 지쳐 누워있던 30대 직장인 여성이 눈을 보며 놀라움과 동심으로 돌아가 설레면서, 성찰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일인극을, 이 공연에는 마법도 없고 특수효과도, 조명도 없다. 엄청난 반전이나 클라이막스도 없다. 가끔 눈물 흘리고, 때론 웃고,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만 게으르고, 바보짓을 하고서 후회하고, 더 자주 아이처럼 웃고 싶어하는 내용이 다다. 관객에겐 밋밋하지만 연출가에겐 진심인 스토리.
눈은 영원히 내가 아이임을 일깨워줄 것이다.
나는 절대 눈을 보고, 퇴근길이 얼까봐 걱정 하지 않을 것이며, 교통체증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름답고 순수한 눈을 걱정거리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없어지려 할 때면 스노우볼을 미친 듯이 흔들테다. 싼타와 루돌프와 선물들이 죄다 뒤엉키게 만들어 놓고 세상 못되게 웃을테다.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흔들며 웃을테다. 내 웃음소리가 커지고 더 커지고 더 커질 때, 마법사가 마법 지휘봉을 내 머리 위에서 흔들며 눈을 뿌리면서 축복하고, 눈의 요정들이 양쪽에서 우아하게 내 쪽을 향해 팔을 뻗으면, 빨간 커튼이 양쪽에서 중앙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