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모양 쿠키 20개를 샀다. 연말에 주변의 고마운 이들에게 이런 뇌물을 전달하는 것이 나의 수줍은 표현이다. 어느 순간 쿠키는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때 적당한 선물이 되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무게와 크기, 작지만 강한 존재감을 주는 쿠키는 주는 나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물질로서 내 손에 두툼히 잡히는 쿠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 관계의 시작이 까마득하여 어느새, 어느 순간 우리가 이토록 친밀하고 가까워 졌는지에 대해서 미스테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리를 하는 마음으로 쿠키,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던, 시작되기 이전으로 한번 거슬러 올라가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마주치기 이전 말이다.
책상 위에 놓인 하얀 그릇 속의 영롱한 노른자로서, 하얀 가루쯤으로 존재하던 그 곳으로. 온갖 가루가 묻기 전의 깨끗한 책상이던 상태로.
쿠키 제작의 첫걸음은 섞기라고 한다. 버터와 설탕을 마구 섞어 잘 녹이는 단계. 서로에 대한 달콤한 혹은 은은한 호감을 가지고 서로 융화되는 시기. 곧 계란과 소금, 베이킹파우더가 쏟아져 내리는 단계-때로는 장애물과 고난이 더욱 끈끈히 우리를 묶어주었고-를 지나 반죽 덩어리 상태로 냉장고 안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나면 밀대에 깔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미운 모습, 귀여운 모습, 미우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쿠키 커터로 하트 모양, 루돌프 모양 등으로 찍어낸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가장 뜨거운 시간을 오븐 안에서 십여분간 울끈불끈 보내고 나면 우리의 모습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모양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너와 나의 관계의 모습이다. 각자의 오븐 속에서 각각의 관계를 새로 구워내고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각자 다른 쿠키의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산 쿠키임에도 20여개의 루돌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일한 공장에서 동일한 커터로 똑같이 찍어냈을테지만 미묘하게 다른 루돌프의 얼굴들.
그리고 나는 안다. 그것들은 표정도 바뀌리라는 사실을.
그 이십여개의 루돌프들은 내가 전달한 이의 집으로 가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표정을 바꾸었을테고, 선물 받은 이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한 얼굴과 표정과 감정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다양한 거리와 다양한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친절함에 감사한다. 일년에 한 번, 한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또한 횟수에 상관없이. 그 자연스러운 관계의 모습들을 아낀다. 부담과 의무감없이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따스한 눈빛과 마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