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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치 Oct 27. 2024

썰매 타기

상계동 아파트 앞 언덕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깔고 탔던 것이 나의 첫 썰매 타기였다. 90년대 초반 부산에서 서울로 막 이사 온 우리 가족은 눈을 보고 좋아라 했다고 한다. 눈을 보기 힘든 부산과 다르게 눈이 많이 왔고, 어느 날 너무 신난 엄마와 우리, 그리고 친한 옆집 아줌마와 아이들은 밖으로 뛰쳐 나왔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옆에 언덕이 있었고 그곳은 눈으로 쌓여 자연 썰매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엄마와 아줌마는 인원수에 맞춰 검은색 비닐 봉지를 어디선가 구해왔고, 애어른 할 거 없이 눈밭에서 구르며 썰매를 탔다고 한다. 굉장히 재미있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더 재밌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사실 이때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엄마가 전해주는 이야기와 전해주던 엄마의 표정에서 그때의 기쁨과 달뜸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짤 중에서 썰매를 타는 심슨짤을 발견했다. 심슨 만화영화를 캡처한 이미지 몇 장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내 핸드폰에 이 이미지들을 저장하고 다닌다. 

캡처본의 시작은 펭귄의 일상을 설명하는 리사와 리사의 말에 딴지를 거는 바트로 시작한다. 펭귄의 지루한 일생, 태어나 자라고 또 똑같은 일을 하는 무한반복.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견해. 하지만 리사는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은 인정하면서 순간에 주어진 완벽한 경험을 즐겨보라고 제시한다. 그 장면 후에 바트는 비탈아래로 몸을 던져 썰매타기를 즐긴다. 아래로, 아래로 슈욱~ 계속해서 내려간다.

상계동에서 탔던 나의 첫 썰매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나는 내 기억력과 상상력의 부족으로 인해 두 가지 이미지를 섞어 본다. 상계동에서의 경험과 바트의 체험을. 


나는 다시 찬찬히 캡처된 이미지를 응시한다. 멈춰진 바트 심슨 캐릭터가 찬찬히 움직인다. 손을 대면 딱 붙을 것만 같은 푸른 얼음과 빙하가 보인다. 빙하 위 더 푸른 하늘 위로 구름이 소리없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바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비탈 아래로 몸을 던진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이내 적응한다.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얼음 비탈 안에서 비밀스럽게 자신의 귀에 들려온다. 바트의 뒤를 따라 호머, 리사, 아기를 안은 매기가 약간은 경직된 표정으로 맨몸으로 썰매타기에 도전한다. 아래로, 아래로, 엎드린 자세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목덜미와 옷 사이로 얼음이 튀어 드는 차갑고 생생한 감각으로,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즐기는 거야’라는 아빠의 말씀조차 잊은 채로, 그 순간에 몰입하여 내려오는 중이다.    


 슈욱 슈욱 비탈을 내려가는 찰나의 순간은 갑자기 정지되어 나무 액자에 들어간 한 장의 사진이 되었고, 거동이 불편하여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노년의 바트 심슨은 그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직 바트의 표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회한의 표정일까. 바트의 시선으로 몇 가지 다른 이미지들이 지나간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미친 듯이 웃는 바트, 마트 캐리어를 보드 삼아 호기롭게 골목을 내려오는 위험천만한 바트. 비상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쾌활한 성인 바트. 아들을 데리고 썰매를 타며 내려오는 바트. 바트는 그 모든 순간들을 가슴에 꼬옥 안고 미소 짓는다. 


슈욱- 슈욱 소리에 귀기울여 보라. 째깍 째깍 시계바늘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당연히 썰매를 타고 있는 중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바트처럼 시니컬하게 또는 방어적으로 굴었던 때도 있었지만, 요즈음에 나는 순간순간이 주는 순수한 기쁨에 전보다 더 자주 취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서산마애삼존불처럼 미소 짓는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면 엄마와 오빠, 아빠, 친구들 모두 같이 신나게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모두 썰매를 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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