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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치 Oct 27. 2024

루브 골드버그


힘없는 작은 공이 툭, 자신은 의도한 바도 희망한 바도 없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법칙에 따라서 툭, 그 움직임이 다시 툭 널빤지를 건드리고, 그 널빤지는 옆으로 도미노를 일으키고, 그 도미노의 끝에서 박스를 밀고, 그 박스는 눈사람 모형을 건드리고, 눈사람은 빗자루를 내리치고, 이 지난한 과정이 맥없는 리듬으로 진행되어 가다가 어느 순간 빨라지고, 더 빨라지고, 그 속도에 힘을 얻어 문득 예상보다 일찍 버튼이 눌리게 되면 알전구가 촘촘히 박힌 거대한 트리에 환한 불이 한순간에 켜질 때, 떠오른다. 이 단순한 결과를 향해 갔던 복잡하고 난잡하고 비실용적인 과정들이.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걸까?

      

트리 영상을 보고나서 ‘루브 골드버그 장치’를 알게 되었다. 모양이나 작동 방법은 아주 복잡하고 거창한데 하는 일은 어이없이 단순한 기계. 단순한 결과를 얻기 위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온갖 장치는 일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길고 지루하지만 혼자서 열심인 모습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같았고, 이 영상은 내게 거울 치료를 시켜 준 셈이었다. 십 여분에 달하는 영상이 끝나고 새로고침 표시가 뜨자 나는 씁쓸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진실은 참 단순한데, 그 과정은 쓸데없이 복잡한 모습이 꼭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같다고.


이 탐욕스럽고 조잡하며 모순적인 장치는 나를 너무 닮아있어 동정과 공감을 넘어 동족 혐오의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불을 켜고 싶다면 나는 버튼을 눌러 불을 켜면 된다. 그러나,,.나는 어떠했나, 고해성사의 시간이 이보다 부끄러울 수 있을까 싶다만 이제 털어놓으려 한다. 나의 만행을.

불을 켜고 싶으면서 버튼은 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전구만 하염없이 바라본다던가 버튼에 손조차 대지 않고 버튼을 따라 그린다던가? 전구의 사진을 찍는다던가.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을 머릿속에만 그린다던가. 전구에 대해 공부하러 학원에 간다던가, 대학원에 간다던가. 논문을 쓴다던가. 하등 관심도 없는 친구에게 버튼과 전구의 관계에 대해 떠든다던가. 그러다 아직도 당연히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보면서 불을 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뇌를 하는 그러한 만행들을 나는 저질러 왔다. 그냥 원하는 것을 그냥 단순히 그냥 하는 것이 그냥 최고의 방법이며 제일 쉬운 방법임을 왜 몰랐을까?

더 완벽한, 더 수월한, 더 유리한, 더 빠른 방법을 찾아다니는 시간에 이미 불을 켤 수 있었을 텐데. 


이 조심성 많고, 완벽주의적인 방식은 내 삶의 모든 방면에 퍼져있었을 테고, 당연히 나의 가장 은밀하고 소중한 취미이자 친구인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순간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연구라는 명목하에 어떤 소설이건 에세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과학 서적을 독파하려 애를 썼고, 이 과정이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이젠 이성적인 접근을 위한 작법서에 기대어 보려 했다. 종류는 시나리오와 소설, 그리고 에세이 작법서까지 달했고, 친근하고 격려를 북돋아 주는 문체부터 마치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쓰레기밖에 쓰지 못할 거라고 저주를 쏟아붓는 분까지 온갖 선생님들의 지도 아래서 나는 글을 쓸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의. 

그러던 어느날 이제는 하산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종이 위에 내가 끄적인 것들은 영 맘에 안들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나는 위의 루트나 혹은 새로운 루트를 뚫어 지름길로 향하는 길에서 자꾸만 멀어지기를 택했던 것이다. 어쩌면 목적지의 역방향으로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악마의 웃음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방탕하고 고장난 네비게이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이것은 뼈아픈 내 루브 골드버그의 예시 중 아주 작고 작은 일부일 뿐이다.


거울 치료의 덕인지. 과거에 써놓은 미래일기 속 날짜가 한참은 지났는데 아직 도미노 단계에 머물러 있는 내 글쓰기 활동 때문인지. 나는 내 책을 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아니 시작하는 중이다. 이번에는 더 이상 빙 돌아가거나 반대로 가거나 오랜 시간 정차해 있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방이 어두우면 버튼을 눌러 불을 키듯이,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저장을 한 뒤, 출력을 하고 책으로 만들어서 서점의 매대 위에, 내가 잘 가는 서점의 매대 위에 내 책을 진열할 것이다. 그리고 피곤한 직원이 앉아 딴청을 피는 틈을 타서 내 책을 서점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로 옯기고, 다음 날에는 그 책을 베스트 셀러 코너로 옮기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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