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_ 4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것은 자시도 피해받기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받는 피해는 감수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개새끼, 꺼저버려."라고 말했다. 회의 시간에 자신이 애써 준비한 안건을 무시한 과장을 향해 던진 말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나는 사실 그 상황이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날 그녀의 모습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상당히 불편했고, 그녀의 언행에 크게 실망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나는 조용히 거리를 두며 관계를 끊었다.
내가 남에게 피해받고 싶지 않다는 태도는 주로 이런 단절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대체로 힘든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의 일상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상대도 이런 책임감에 힘들까, 나는 힘든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말해서 마음의 짐을 주지 않는 일. 그것이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든 마음을 억압하니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하면 이해할리 있겠는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계속 이야기하는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 '피곤한 사람'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판단하고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았다. 그때 그 동생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되어서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 과장을 인해 이미 몇 번이고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가족 문제로도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감정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으며, 평소의 그 친구라면 하지 않았을 표현이었다. 나는 뒤늦게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웠다.
나의 고통은 마땅한 것이었다. 사람을 내 잣대로 분별하고 판단한 값이었다. 세상에는 용납되지 않는,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 행실이나 구실로 사람을 판단하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분별법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이분법적 사고로 이어진다. 우리는 종종 흑백 논리에 빠져서 사람을 '좋다'와 '나쁘다'로 나누며 판단하곤 한다. 둘로 나뉜 한 편에 서서 "나는 피해는 안 줘." "그건 잘못됐어. 난 절대 안 그래."라고 믿는다. 판단기준이 많을수록 사고의 유연성은 줄어들고 경직된다. 자신만의 기준에 사로잡혀, 결국 고립된 완벽주의자가 되어 외로워지고 만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 똑같은 일에도 내가 기분 나쁜 날에는 예민하게 느끼고, 기분 좋은 날에는 "그럴 수 있지."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사람이라서 너무 황당하고 힘든 날에는 별별 말과 행동을 하곤 한다.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두둔하는 말은 아니다. 단 한 번의 실수나 잘못된 순간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을 지양하자는 말이다.
감정을 억제하기보다 적절하게 표현하고, 남과 나의 연약함을 받아들일 때 사람다움이 무르익는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적절히 품는 마음이 커질 때 비로소 스스로를 옥죄던 '완벽주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