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시대라는 말이 무색한 곳이 있다.
1년 가깝게 자연임신이 되지 않자 다니고 있던 산부인과에서 난임 전문 병원을 권했다. 난임 전문 병원의 존재조차 몰랐던 나에게 저 말이 왜 이리 서운하던지. 병세가 악화되어 더 상급 병원으로 가라는 진단을 받은 환자의 마음이 이런 걸까?
찾아보니 집에서 버스로 3 정거장 거리에 규모가 큰 난임 병원이 있었다. '여기까지 꼭 가야 하는 걸까?' 거만한 (?) 마음에 3 정거장 거리의 길을 나서는데 2달은 더 걸렸다.
난임병원에 다니게 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세상에 난임부부가 많다는 것이다. 큰 병원에 사람들이 가득이다. 특히 평일 오전, 주말에 가면 병원 앞에 차가 줄을 서고 진료 대기가 1시간은 기본이다.
심지어 진료 순서는 내원 순이기에 미라클모닝 라이프가 따로 없다. 아침 6시 30분부터 내원 명단 수기작성이 가능한데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앞 순서를 놓치기 십상이었다. 우리에겐 3 정거장 거리에 난임병원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니, 이렇게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데 누가 저출산 시대래? 내 눈에는 이 상황이 의아했다.
사실 내 주변 난임부부는 나뿐이라 난임이 엄청난 희귀 질병처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임병원의 많은 사람들을 보니 우습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이 든다.
'당신들도 나와 같은 마음, 상태인가요?'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지만
(심지어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 병원 지붕 아래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이 생긴다.
내가 임신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자 주변사람들이 종종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시어머님과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한약방 방문을 추천해 줬다. 찾아보니 맘카페에서도 이미 유명한 곳이었고 이곳에서 약 먹고 임신에 성공한 연예인들의 사례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귀가 솔깃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삼신할아버지 원장님의 아드님이 운영하시고 삼신할아버지 선생님께서는 주말 오전에만 진료를 하신다. 즉 삼신할아버지의 진맥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그 시간대를 노려야 하는 것이다. 다녀온 후기를 보니 입이 떡 하니 벌어진다. 인기가 너무 많아 새벽 아니 그전 날에 미리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약방 오픈런인 것인가…..!
퇴근하자마자 남편과 나는 KTX를 타고 경주로 내려갔다. 준비물은 줄 서기를 위한 간이의자와 우리의 연락처가 적힌 인쇄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현타가 올 때쯤 한의원 앞에 도착했다.
닫힌 한의원 앞에 의자가 쪼르르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던 현타도 뒷걸음치며 돌아갔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그 간절함과 진심이 이 의자행렬에 하나하나 묻어났다. 의자만 보았을 뿐인데 같은 링에 올라가 있는 이들에게 뭉클함이 느껴진다.
산에서 소원을 빌며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우리의 의자를 펴놓았다.
의자 줄을 세우고 병원 앞에 바로 잡은 숙소에서 잠을 잤고 다시 아침 일찍 나간 덕에 삼신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뵌 건 3분 남짓. 이 3분을 위해서 서울에서 경주까지, 의자 오픈런. 재미있었다.
물론, 삼신할아버지의 영험함은 나에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밤 우리와 함께 밤을 지새운 23개의 다른 의자 중 하나라도 조금 더 내 몫까지 받아 성공했길 바라본다.
어쩔 때는 남편보다 선생님보다 더 든든한 사람들이다. 난임카페에 가입하기도 하고 나와 같은 병원에 다니는 분들의 영상, 블로그 후기를 찾아본다. 각자의 사정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마음은 구구절절 다 공감이 된다.
특히 난임일기를 찾아볼 때는 최신글순으로 먼저 이분의 현상태를 확인하고 선택한다. 임신 성공일 경우에만 마음 놓고 일기를 읽는다. 해피엔딩인지 자발적으로 스포 당하고 드라마 보는 거랑 비슷하려나. 이 상황들이 결국 쌓이고 다 지나고 나니 결국은 성공에 이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나의 결과라 스포 당하고 싶은 거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곧 희망이다.
이렇게 저출산시대라는 말이 무색한 곳들이 있다. 임신이 선택이 된 만큼 임신을 선택한 사람의 간절함은 이전보다 더 크고 절실해졌다.
그래서 나는 임신 =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불쾌해하는데 나와 가족이 행복하려고 한 선택에 애국이라는 이상한 재를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매국이 아니듯 말이다. 아이를 낳겠다는 노력을 하겠다는 선택을 그저 그 말 그대로 보고 존중하고 응원해 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