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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Oct 21. 2020

7호선의 마술사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7호선 지하철은 여느 때처럼 강을 건너 내가 좋아하는 지상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하철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시공간을 초월한 세상의 경계 밖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퀸즈 Queens의 나지막한 빌딩 옥상과 하늘이 만나는 울퉁불퉁한 경계선이 언제나처럼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이른 퇴근 시간이라 열차 안은 그럭저럭 붐비고 있었지만 빌딩 숲 위에 보이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최면에 빠진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지하철이 퀸즈의 첫 번째 역에 도착했을 때 반대편 문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퀸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멕시코 혹은 남미 출신의 남성으로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마르고 조금 왜소한 키에 좁은 어깨와 굽은 등을 가진 그 남자는 마트에서 훔쳐온 것 같은 카트를 끌고 있었다. 언뜻 전형적인 뉴욕의 지하철 노숙자와 비슷했지만 그는 여느 노숙자와는 조금 달랐다. 유행에 한참 뒤처졌지만 정성 들여 다듬은 콧수염과 턱수염에서 오랜 시간 공들인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짙은 보랏빛이 도는 벨벳 재킷과 굵은 다홍색 세로 줄무늬가 돋보이는 하얀 바지는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이마저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19세기 마술사들이나 썼을법한 마술 모자와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로 자신을 주변의 배경과 확실히 분리시키고 있었다. 화려하게 눈길을 끄는 옷차림이었지만 그의 외모는 벽장 속 짙은 먼지에 뒤덮인 듯 어딘지 모르게 남루해 보였다.


뉴욕에서 카트를 끌고 노숙자가 지하철을 타는 모습은 정장 차림의 회사원이 열차에 오르는 것만큼 흔한 풍경이기에 그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양한 길거리 패션이 넘치는 도시의 시민들답게 그의 옷은 나를 제외한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하는 듯했다. 나 역시 보통은 시시한 노래를 부르거나 자질구레한 물건을 팔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길을 돌릴 테지만 그날따라 자꾸만 그에게 눈길이 갔다. 선글라스 속 보이지 않는 그의 시선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짙은 보랏빛이 도는 벨벳 재킷과 굵은 다홍색 세로 줄무늬가 돋보이는 하얀 바지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열차의 문 앞에 구부정하게 서 있던 그는 별안간 자신이 쓰고 있던 마술 모자를 두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벗어 들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전개에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점잖은 인사가 무색하게도 열차 안에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설픈 무대에서 어정쩡한 공간에 인사를 했지만 눈빛을 가려주는 선글라스 덕분인지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굳게 닫힌 그의 얇은 입술에서는 모진 풍파를 헤쳐온 듯 지치고 담담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그가 벗었던 모자를 두 손으로 한 번 더 빙글 돌리더니 오른손 바닥으로 모자챙 위쪽을 쓱 훑었다. 챙 아래쪽에서 무언가 따뜻해 보이는 것이 꾸물거리며 순진한 얼굴을 내밀었다. 모자에 담긴 흰 토끼를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턱이 반쯤 내려간 채로 나도 모르게 양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있었다.


순식간에 토끼는 모자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저 토끼 보셨나요 라고 옆 사람에게 외치고 싶은 심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나 말고 토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사실 그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 것 이외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짧은 인사조차 없었기에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녹색 담요 아래 카트 속에서 손을 휘젓던 그가 가늘고 긴 막대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막대기를 손수건으로 바꾸는 뻔한 마술 같았지만 가슴속에 묘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그는 자신이 든 것이 막대기임을 무대 주변의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주려는 듯 왼쪽과 오른쪽을 차례로 바라보며 막대기를 가로로 반듯이 들어 보였다.


마술 모자를 막대기로 툭툭 가볍게 건드리자 비둘기가 날갯짓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만으로도 꽉 찰 것 같은 모자 안에 비둘기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눈길 조차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후 막대기는 예상대로 형형색색의 손수건으로 변했지만 내 놀란 마음이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행여 옆사람에게 핀잔이라도 들을까 두려웠는지 소심한 손놀림으로 손수건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재킷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얀 깃털의 비둘기는 고이 모셔 녹색 담요 아래 넣어두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한 두 가지 자잘한 동전 마술과 카드 마술을 더 보여준 그는 공연이 끝났는지 열차의 앞쪽과 뒤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가볍게 굽신거렸다. 나는 이제 그 남자가 자신의 마술 모자를 뒤집어 들고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주는 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은 그의 마술만큼이나 내 예상 밖이었다. 그는 열차 통로 깊은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분명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열차에 탄 사람들의 얼굴을 각각 차례로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뒤로 돌더니 반대편 열차 통로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조용하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조용한 눈빛과 절제된 행동에서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문득 나는 그가 자신의 공연을 본 관객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관객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돌아서더니 이내 지하철에서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공연을 본 관객이 아무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바로 관람료를 내야 할 관객임을 깨닫고 서둘러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 좀 봐요 라고 외치려던 찰나 나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내 지갑에는 이십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이십 달러면 돼지고기 두 근에 오렌지와 우유, 그리고 계란까지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일 년 내내 생활비에 쪼들리는 유학생에게 이십 달러짜리 지폐는 길거리 공연 관람료로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돈이었다. 오 달러짜리 지폐만 됐어도 큰 맘먹고 기부할 수 있을 텐데 이십 달러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술사가 조용히 열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지하철에서 공연을 하고 팁을 받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따라 내려서 지금 무엇하시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열차 문이 닫혔다.




얼마 전 마트에서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바이올린을 손에 쥔 남자를 보았다. 4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배가 나오고 앞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 어디쯤에서 온 것 같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의 발 밑에는 과일 상자에서 뜯어낸 듯한 널빤지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검은색 마커로 삐뚤삐뚤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일하던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시동을 걸고 마트를 떠나려던 찰나 아름다운 아베 마리아의 선율이 주차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마법에 걸린 듯 차 안에 앉아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실직한 중년의 가장이 연주하는 찬송가의 음색에는 어딘가 숭고함이 묻어 있었다. 이 연주자를 어딘가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트를 끌고 마트로 들어가거나 차에 장바구니를 싣고 떠나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바이올린 연주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폐와 동전을 막론하고 현금이 한 푼도 없었다.


“혹시 현찰 가진 것 좀 있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아내는 핸드백과 주머니를 탈탈 털어 삼 달러 조금 안 되는 돈을 겨우 마련했다. 그리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 주차장 끝자락에 있는 중년의 연주자의 모금함에 현찰을 털어 넣었다. 관람료를 더 내고 싶었던 나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전달되었는지, 그는 아내뿐 아니라 먼발치의 차 운전석에 앉아있던 나에게도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일하던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8년 전 뉴욕의 지하철에서 만났던 마술사가 생각났다. 그때 삼 달러가 있었고 오늘 이십 달러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운명은 이상한 유머감각을 지닌 듯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8년 전 홀연히 사라졌던 그 마술사가 내 앞에 나타났다. 반가운 나머지 나는 그를 향해 묻어두었던 질문들을 꺼내 들었다.


마술사 아저씨,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건가요. 큰 소리로 마술쇼의 시작을 외쳤어야 하지 않았나요.


나는 나의 방식으로 말했단다.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고 주차장에서 아베 마리아를 연주했잖니.


그때 제겐 왜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나요. 왜 그렇게 조용히 지하철에서 내리셨죠.


너에게 이십 달러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오빠, 우회전!”


집으로 나가는 출구를 두 개나 지나치고서야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참이나 아베 마리아의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매 주말마다 같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갔지만 다시는 그 중년의 바이올린 연주자를 만날 수 없었다. 내 차 안에는 지금도 주인을 기다리는 꼬깃꼬깃한 이십 달러짜리 지폐가 우두커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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