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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Oct 28. 2020

이방인의 식탁

어퍼 웨스트 Upper West 96가에 도착한 우리는 2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웅장한 석조 외벽의 아파트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맨해튼 고급 아파트에만 존재한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도착한 우리는 쭈뼛거리며 어느 문 앞의 벨을 눌렀다.


“네, 나가요.”


귀에 익은 한국어로 대답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삿짐 때문에 엉망이지만 들어오세요.”


일곱 평 남짓해 보이는 방은 책상과 옷장, 침대를 비롯한 온갖 짐들이 뒤엉켜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이사를 가시나 봐요. 20대 중반의 싹싹해 보이는 남학생은 일 년 간의 어학연수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며 방 한 켠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과연 우리가 인터넷 중고 장터에서 봤던 작은 탁자가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꾸깃꾸깃 놓여 있었다.


흔한 장식 하나 붙어있지 않은 싸구려 앉은뱅이 탁자는 이미 오랜 기간 사람의 손을 거친 탓인지 표면의 색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합판에 검은색 칠이 되어 있는 상판 아래로는 네 개의 철제 다리와 지지대가 놀이터의 앙상한 철봉처럼 붙어있었다.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네 개의 다리 아래에는 각각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붙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나마 한 개는 빠져서 구멍이 휑하게 보이는 상태였다.


그곳에는 과연 우리가 인터넷 중고 장터에서 봤던 작은 탁자가 이삿짐 상자들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Photo by Agata Create on Unsplash


“이 탁자 얼마나 쓰셨어요?”


그는 자신도 어학연수 초기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으로부터 중고로 건네받은 물건이라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짧은 기간 동안 탁자에 정이 들었는지, 그는 자신이 이 탁자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조곤조곤 떠들었다. 


식탁을 떠나보내는 그의 고별사를 잠자코 듣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오 달러를 건넸다. 그는 공손히 지폐를 받아 청바지 앞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저 스탠드도 파시나요?”


“저건 이미 팔렸어요. 저녁에 누가 와서 가져가기로 했어요.”


우리는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세간을 거두어 가려는 마음에 비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이미 대부분의 물건이 팔린 상태였다.


“그럼 저 드라이어는요?”


아내는 화장실 세면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헤어드라이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오 달러라고 말했다. 전기를 연결하자 천박한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머리카락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렀다. 그래도 따뜻한 바람은 나오니 아직은 드라이어가 맞는 듯했다. 나는 십 달러 지폐를 주고 아까 주었던 오 달러 지폐를 다시 돌려받았다. 우리는 안전한 비행되시라는 인사와 즐거운 뉴욕 생활하시라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집을 빠져나왔다.


“우리 택시 탈까?”


아내는 오 달러짜리 탁자를 사고 이십 달러어치 택시를 탈 생각이냐며 내게 면박을 주더니 이내 ‘무거워?’라고 물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냐 괜찮아, 우리 지하철 타자. 답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대답할 뿐이었다.


아파트가 허드슨 강변 가까이에 있어서 우리는 십여분 동안 제법 먼 길을 걸어 나와야 했다.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어퍼 웨스트 아파트 숲 사이로 앉은뱅이 탁자를 짊어지고 걷는 내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탁자를 등에 업은 거북이 같은 내 모습을 누군가 베란다에서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전망 좋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실크 파자마에 최고급 위스키와 쿠바산 담배를 손에 들고 날 비웃고 있겠지. 속도 없는 아내는 아까 산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쥔 채 아파트 구경을 하며 덜렁덜렁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초가을로 접어들었지만 탁자를 짊어지고 십여 분을 걸으니 땀이 쏟아졌다. 다행히 택시를 잡으려는 마음이 들기 전 지하철 역 입구가 나타났다. 우리는 표를 끊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미끄러져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고물 탁자를 등에 이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지하철에 오르는 초라한 이민자 커플의 모습은 화려한 맨해튼의 이미지에 큰 누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옆의 여자는 방금 산 것인지 곧 버릴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꼭 쥔 채, 시골쥐처럼 멍하니 서 있지 않은가. 나는 탁자를 머리에 이고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 지하철에 올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쓸데없이 부끄러워하던 내 모습에 쓴웃음이 지어지지만 당시에는 초라한 몰골로 지하철을 타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사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물정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겨우 핸드폰을 개통하고 월셋집을 구한 것이 한 일의 전부였고,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열 평짜리 원룸 바닥에서 며칠 동안 밥을 먹었다. 집세가 생각보다 너무 비싸 가구를 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곧 식탁이 없는 삶이 얼마나 반문명적인지 절감하고 용기를 내어 식탁을 사기로 결정했다. 지하철 타는 것 조차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중고 식탁 구매는 상급 미션이었다. 우린 삶을 위해 정착하는 것과 여행을 위해 방문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차차 알게 된 사실이지만 뉴욕 지하철 안에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인간군상들이 모여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자장수부터 조커에 나오는 갖가지 악당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는 인간군상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앉은뱅이 탁자와 고물 헤어드라이어를 가진 커플은 다른 사람들의 눈곱만 한 관심조차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차분한 지하철 여행이 끝나고 십여분을 더 끙끙거리며 걸어온 끝에 우리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집에는 누군가 쓰다 버리고 간 매트리스 외에도 식탁으로 쓸 낡은 탁자와 멋을 낼 때 유용한 고물 헤어드라이어도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식탁을 얻게 된 것을 자축하며 라면을 끓여 먹었다. 예쁜 라면 그릇은 없었지만 우리에겐 식탁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그날 산 앉은뱅이 탁자에서 무려 오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일 식사를 했다. 그 탁자는 우리에게 문명인처럼 식사를 즐기게 해주는 식탁이자 대화의 통로였으며 고민을 공유하는 소통의 창구였고, 팝콘에 맥주와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오락의 마당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탁자는 우리가 기이한 운명에 이끌려 지구 반대편 낯선 땅을 헤매고 있을 때, 삶의 구심점이 되어준 상징이었다.


몇 년 뒤 우리에겐 유리 탁자와 철제 의자가 생겼다. 그 후로 다시 몇 년이 지난 뒤, 우리는 깔끔하고 모던한 나무 탁자와 예쁘고 편안한 식탁 의자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십 년 전 고물 앉은뱅이 탁자에서 받았던 위로와 행복을 기억한다. 우리는 매일 저녁 돌아올 식탁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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