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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데리러 가는 길

동생의 장례식

by 오맑음


바로 중국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윤옥씨는 여권도 없었다. 급하게 여권을 만들고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긴급으로 중국 비자도 받았다. 그리고 동생 회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가는 아침 비행기를 탔다. 상해 푸동 공항에 도착해서 동생의 회사 사람들을 만났다. 동생이 있는 곳까지 차로 3시간이 넘게 가야 했다. 윤옥씨는 소식을 들은 이후 거의 먹지를 못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자꾸 먹으려고 했다. 지금 그래도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니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차는 내리 달렸다. 물의 도시라는 항저우를 지나가는데 물안개가 자욱했다. '이렇게 습기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근처 휴게소에 들러서 휴게소 구경을 했다. 나는 지나치지 않은 명랑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또 한시간 넘게 달려 동생이 일하던 도시에 도착했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밥은 먹고 다니냐'며 동생이 연락을 해 올 때 '거긴 어떻냐'라고 하면 '여기 너무 좋아'라고 말하던 그 곳이었다.


서류 작업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중간에 우리는 장례식장을 들러 티비에서 본 영안실이라는 곳에 가서 커다란 냉장고 안에 더플백에 쌓여 누워 있는 동생을 확인했다. 윤옥씨는 무너져 내렸다. 나는 윤옥씨를 안아 올렸다. 시선은 계속해서 누워있는 동생을 보았다. 너무 평온해 보여서 잠이 든 것 같았다. 죽음이 더 믿어지지 않았다. 흔들어서 깨우면 '어 누나?'하면서 일어날 것 같았다. 짧았던 영안실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서류를 떼러 다녔다. 여기로 가랬다가 저기로 가랬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이 없는 게 다행인가 싶을 정도로 슬픔을 느낄 틈이 없었다. 겨우 서류를 다 정리하고서야 동생을 화장할 수 있었다. 이것 저것 골라야 하는 것이 많았다. 망자가 입을 수의를 골라야 했다. 당연히 한국식 수의는 없고 무엇인가 화려해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중국식 수의를 골랐다. 한국까지 데려가려면 납골 함에 담아야 해서 납골함도 골랐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푸동 공항으로 갔다. 나는 비행기에 앉았는데 동생은 기내 선반에 탔다. 기분이 묘했다. 비행기는 금방 인천 공항에 내렸다. 저녁이어서 납골당으로 갈 수 없었다. 하루를 서울에서 보냈다. 윤옥씨는 여정 내내 잠을 자지 못했다. 안쓰러이 잠에 들어도 악몽을 꿨는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곤 했다. 나도 덩달아 잠을 자지 못했다. 윤옥씨가 숨을 너무 미약하게 쉬어 무서웠던 것이다. 윤옥씨 침대 옆에 붙어 앉아서 윤옥씨 코 밑에 손을 대어 보고는 숨을 쉬면 잠시 눈을 부쳤다. 그러다가 윤옥씨가 소리를 지르면 같이 깨어 윤옥씨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서울 이모집에 와서야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납골당으로 갔다. 가까운 분들이 오셨다. 목사님이 오셔서 간단히 장례 절차를 진행해 주셨다. 납골당에서 제일 빛이 잘 드는 곳에 함이 안치됐다. 죽어서도 그 빛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윤옥씨 마음이 편안하다면 뭐든 상관이 없었다.


조촐한 장례식을 마치고 납골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분들에게 윤옥씨와 내가 대접 할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밥을 넘겼다. 윤옥씨와 나는 그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사촌동생들을 맡길 곳이 없어서 집에 두었던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소식을 아는 분들이 집에 들러서 아이들을 챙겨 주셔서 잘 지냈다고 한다. 아이들은 윤옥씨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고모를 기다렸다. 엄마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막내는 윤옥씨를 보자 윤옥씨를 안고 엉엉 울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와 아이를 잃은 윤옥씨는 서로 껴안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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