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긴 대화

소리보다 더 오래, 오래.

by 낮은목소리

나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혼자 있을 땐 더 그렇다. 대부분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문장으로 꺼내지 않아도 충분한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가족과, 특히 아내와 함께 있을 땐 다르다. 우리는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아내가 말을 시작하고, 나는 듣는 편이다. 묻고, 듣고, 웃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는 마음들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며 지낸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오래 눌려 있던 조용한 기억들과 마주하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쳤던 순간들,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간 감정들, 그것들을 다시 꺼내어 붙잡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어떤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조심스럽게라도 말할 수 있다. 말보다 긴 대화는, 어쩌면 바로 그런 시간 속에서 시작된다. 한 번도 말로 설명한 적 없는 기억들을 되살리는 일, 그건 조금은 조용하고 조금은 용기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한다. 패티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누기도 하고, 어떤 날은 카페에서 서로의 침묵을 공유하기도 한다. 강아지가 무릎에 기대어 졸고, 햇살이 잔잔히 테이블 위에 퍼질 때, 우리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말이 필요할 땐 꼭 꺼낸다. 그게 우리 사이의 약속처럼 자리 잡았다. 대화라는 건 꼭 소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배워왔다.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자주 생각에 잠긴다. 그 말들 속에는 나에 대한 마음도 있고, 스스로가 감당해 온 하루도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자주 되묻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의 언어로 천천히 답한다. 그런 대화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말로 급히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다. 듣는다는 건, 말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걸 요즘 더 자주 느낀다.

하루는 늘 같은 질문들로 시작된다. "잘 잤어?"라는 인사는 단순하지만, 그날 하루의 감정을 가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점심 무렵엔 "밥은 먹었어?"라고 묻고, 저녁이면 "오늘 하루 어땠어?" 하고 대화를 연다. 이 세 문장은 식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평범한 질문들이 오히려 관계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다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리듬을 맞추고, 서로의 하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하루의 끝엔, 꼭 저녁을 함께 먹는다. 따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어땠든, 밥상 앞에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날 하루는 정리된다. 밥보다 말이 더 필요한 날도 있고, 말보다 밥이 위로가 되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이든, 우리는 그 시간을 꼭 함께 보낸다. 식사 시간은 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순간이 아니라, 하루 동안 각자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이 다시 같은 리듬으로 맞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끔 다툰다. 감정이 부딪힐 땐 오히려 말이 많아진다. 평소보다 더 솔직하고, 더 깊은 말을 꺼내게 된다. 그런 순간엔 우리가 아직도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하지 않으면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결국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말하고, 싸우고, 또 다시 듣는다. 다툼은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때로는 그 과정을 통해서만 꺼낼 수 있는 마음이 있고, 오해를 통과한 후에야 다다를 수 있는 진심이 있다.

나는 믿는다. 다툼은 어쩌면 가장 진솔한 소통일지도 모른다. 싸우지 않으면 꺼내기 어려운 마음이 있고, 그 순간만이 허락하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있다. 말다툼 뒤에 찾아오는 침묵, 그 사이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는 거리, 그것이 생기는 시간이다.

결국 모든 말은 “사랑해”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늦었어”일 수도 있고, “왜 그래?”일 수도 있고, “괜찮아”일 수도 있다. 같은 마음이지만, 다른 표현. 우리는 매일 그 말을 다른 언어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말이라는 형식은 바뀌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꾸준히 서로를 향하고 있다.

이 연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삶은 늘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기억보다 오래 남는 침묵, 설명보다 깊은 존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함께 살아가는 관계라는 이름으로 매일 조금씩 쌓인다. 말보다 긴 대화는 끊기지 않고 흐르는 대화이고, 기억으로만 남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듣는다. 아내의 말, 그 말 사이의 공백, 말 뒤에 숨은 표정과 호흡을. 그리고 나도 말한다. 그 모든 것들을 담아 천천히.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말을 주고받고, 매일 조금씩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간다.

이건 우리 사이의 방식이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느리게 흘러가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