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말

삶이 계절처럼 피고 진다

by 낮은목소리

아침 공기에 서늘함이 감돌면, 나는 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손끝이 먼저 반응하고, 햇살의 방향이 살짝 달라지는 걸 느끼고 나서야, 머리로 계절을 인식한다. 나에게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공기의 결, 그림자의 길이, 냄새의 농도로 다가온다.

나는 오래전부터 달력보다 계절을 기준으로 살아왔다. 누가 정해놓은 날짜나 시각보다, 땅이 말해주는 감각이 더 정직하고 정확하다. 계절은 거짓이 없다. 반복되면서도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그런 자연의 리듬 안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고, 나를 정돈하게 된다.

계절을 기준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자연에 맞춘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언제 멈추고 언제 나아갈지를 내 안의 리듬으로부터 판단하는 삶. 급하게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흐름을 느끼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봄은 생동감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정리의 계절이다. 겨우내 묵은 감정과 사물, 습관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자리들을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막 돋아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비워야 한다.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는 공백이 필요하다. 나는 봄이 오기 전, 늘 책장을 다시 정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묵묵히 나눈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공간도 함께 비워진다.

여름은 속도를 늦추는 계절이다. 햇볕이 강할수록 사람은 천천히 걷게 되고, 땀을 식히기 위해 멈춘다. 사람 사이의 거리도 여름에는 조금씩 느슨해진다. 무더위 속에서는 불필요한 말을 덜 하게 되고, 차라리 침묵이 위로가 된다. 여름은 머무는 법을 알려준다. 빠르게 지나가려 할수록 더 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계절. 나는 여름을 통해, 서두르지 않고 그대로 있어보는 연습을 배운다.

가을은 관조의 계절이다. 바람이 분다. 그리고 나는 더 안으로 향한다. 고요해지고, 자주 돌아본다. 내 안에 쌓인 것들을 꺼내 보고,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지 묵상하게 된다. 세상은 황금빛으로 물들지만, 나는 검은 잉크처럼 조용히 마음 속을 채운다. 가을은 결산의 계절이다. 무엇이 남았는지를 들여다보고, 남은 것을 잘 간직하기 위한 계절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오면 더욱 덜어낸다. 말도 줄이고, 약속도 줄이고, 생각의 가지치기를 한다.

겨울은 정지의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길거리는 조용해지고, 세상은 마치 안으로 숨는 것 같다. 나는 이 계절을 가장 조용히 받아들인다. 겨울은 삶이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시간이다. 눈은 모든 것을 덮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드러낸다. 뼈대만 남은 풍경 속에서 본질이 보인다. 나는 겨울마다 나 자신을 뼈대처럼 마주한다. 덧칠 없이, 설명 없이,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계절을 기준으로 산다는 건, 결국 나를 기준으로 산다는 뜻이다. 바깥의 흐름을 들여다보며, 내 안의 흐름을 정직하게 따르는 삶. 그러기 위해서는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각을 열고, 자연의 미세한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 작은 변화에 반응하고, 그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것. 자연은 늘 말없이 알려준다. 지금은 기다릴 시간이라고, 지금은 나아갈 수 있다고.

우리는 대부분 시계와 일정표로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속도다. 나의 속도는 다를 수 있다. 계절은 그런 내면의 시간을 회복시켜 준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지금 이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계절이 말해주는 삶의 방식은 어쩌면 지금 시대와 가장 반대되는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귀하고, 더욱 지켜야 할 리듬이다.

삶은 반복된다. 사계절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안의 나는 매번 다르다. 같은 계절, 같은 장소, 같은 하루라도, 나는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존재한다. 계절이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계절을 따라가며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바꿔간다.

계절은 생명의 흐름을 가르쳐준다. 봄은 움트고, 여름은 뻗고, 가을은 수확하고, 겨울은 잠든다. 모든 것은 결국 이 순환 안에서 머무른다. 나도, 나의 감정도, 관계도. 어떤 시기의 멈춤은 끝이 아니라 다음의 시작을 위한 준비이고, 어떤 감정의 저물음은 다른 감정이 피어오를 자리를 만든다. 이 리듬 안에서 나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침묵과 회복을 바라본다.

삶은 선이 아니라 원이다. 끝없이 순환하면서, 다만 조금씩 안으로 혹은 바깥으로 나아가는 원. 그래서 어떤 순간은 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계절을 타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그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부활과 갱신을 믿는다.

사랑도 계절을 닮았다. 갑자기 피지 않고, 천천히 물이 오르고, 오래 머무르고, 때로는 잠시 멀어진다. 다시 말하지 않아도 다시 느껴지는 온기, 꺾였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피어나는 마음. 사랑은 꽃처럼 피는 것이 아니라, 계절처럼 오고 가며, 그 존재로 우리를 바꾼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꽃피는 계절을 기다린다기보다, 사랑이 어느 계절에든 머물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꾸는 쪽을 택한다.

나는 앞으로도 계절을 기준으로 살아갈 것이다. 일정보다, 목표보다, 그보다 앞서 내가 지금 어떤 계절에 있는지를 먼저 물을 것이다. 그 계절이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허락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들어볼 것이다. 그렇게 계절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은, 천천히 하지만 더 단단하게 쌓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삶은 나를 나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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