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땅 끝에서의 시작
폭발이 있던 다음 날, 나는 해군 기지로 임시 이동되었다. 사고 직후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지시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머물던 익숙한 공간은 폐쇄되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내 차는 사고 처리 과정 중에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돼 있었다. 이사도 없이 몸만 이동했고, 짐도 거의 없었다.
처음 도착한 해군 기지는 무척 낯설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땅끝자락에 있었고, 주변엔 가게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숙소라고 부르기엔 너무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방이었다. 바닥은 냉기 가득했고, 창문 밖엔 불빛 하나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물도 정수되지 않았고, 매번 끓여서 마셔야 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정수되지 않은 물을 끓여 마시는 일이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밥이었다. 급식도 없었고, 식당도 멀었다. 출근은 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교통편은 하루 두 번 뿐이었고, 놓치면 다음 수단은 없었다. 추운 날씨에 고장 난 히터, 안개 낀 도로, 무거운 방음 귀마개를 끼고도 울리는 귀속 이명. 출근길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에 집중도 되지 않았고,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도 헷갈렸다.
보상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보상 절차는 시작됐다'는 말만 들었다. 어떤 이는 2년 정도 걸릴 거라 했고, 어떤 이는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어쩌면 나는 이 모든 걸 그냥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도, 내 일도, 내 생활도 한순간에 바뀌었지만, 시스템은 그걸 다루는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장 씁쓸했던 건 책임자였다.
사고 직후 상황을 정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자리에 있던 그는, 다음 날 갑자기 은퇴했다.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어떤 공식적인 해명도 없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각자 자리를 지켜야 했고, 그 가운데 나도 포함돼 있었다. 책임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허무였다.
그 기지에는 나를 포함해 총 27명이 있었다.
모두가 제각기 방 하나씩 배정받았지만, 그 방은 쉼의 공간이라기보단 격리실 같았다. 누구도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고, 나조차 누가 어느 방에 있는지도 몰랐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앓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밤에만 불을 켰다. 어쩌면 나처럼 귀가 들리지 않거나, 몸의 감각을 잃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서로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아무도 위로할 여유가 없었고, 서로를 이해할 힘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단 하나 버팀목이 있었던 건, 지금의 아내, 당시 여자친구였다. 사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녀는 회사에 emergency라는 말을 던지고 바로 차를 몰고, 왕복 7시간 거리를 달려와 따끈한 한식 도시락을 건네줬다. 밥과 국, 김치와 반찬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나는 그 따뜻한 냄새에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다. 또, 치약, 수건, 속옷, 세면도구, 그리고 따뜻한 옷까지 직접 챙겨다 줬고, 나는 그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사하다는 말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녀가 돌아간 후, 문득 방 안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바라봤다. 손에 들려 있는 그녀가 건넨 생필품 하나하나가 내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붙잡아주는 끈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신경 써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줬다. 누군가의 삶에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은, 그날 이후 처음 느낀 온기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을 시도했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귀의 울림은 점점 더 커졌지만, 적어도 출근은 했다. 누군가에게 복귀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군의 체계에 순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내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반복이었다. (사실 지금 회상하면 '나는 이정도 일로도 멀쩡하게 버틸수있는 사람이다..' 같은 과시욕도 있지 않았나 싶다..) 버스를 타고 기지로 향하는 동안 창밖 풍경은 하루도 다르지 않았고, 어쩌면 그 안에서 내 감정도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있어야만 하는 교신절차들이 있었다. “Runway 12, wind 125/25, altimeter 29.992, both cables up.”
“Demon 25, traffic heli take off South of Runway 12, will remain south at all times, winds..”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익숙한 문장들이 되뇌어졌지만, 실제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무전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젠가 다시 말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한 번은 관제석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냥 갑자기 공기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고, 무전기가 켜져 있다는 사실이 숨이 막히게 했다. 복귀를 했다고 해서, 내가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관제사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내 목소리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방 안은 더 차가워졌다. 가끔은 귀를 막고 자려고 해도 이명은 점점 더 또렷하게 울렸고, 심장은 자주 이유 없이 빠르게 뛰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보는 밤이 반복됐다. 이 모든 상황은 내 안에 아주 깊은 침묵을 만들어냈고,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무너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조차도 그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시기의 나는, 존재는 했지만 삶이 아니었다. 하루를 버티는 것이 목표였고, 그 하루의 끝에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주는 기억이 있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