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지 않다"는 고백
그날은 참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떴고,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고, 같은 옷장을 열어 늘 입던 셔츠를 꺼냈다. 출근길 도로는 여전히 꽉 막혀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어제 들었던 노래가 또 흘러나왔다. 업무용 컴퓨터에 로그인하고, 메일함을 열고,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하품을 몇 번 하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았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너무도 평범해서 기억에 남을 이유조차 없던 하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은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말할 일 없는 날이었지만,
나에겐 조용한 깨달음이 찾아온 날이었다.
갑작스럽게 벼락처럼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문득—정말로 문득—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은 매우 조용했지만, 내 안에서는 큰 파동처럼 번졌다.
한동안 머릿속에 무언가를 밀어넣듯 바쁘게 살아왔고,
해야 할 일, 처리해야 할 문서, 끝내야 할 보고서, 받아야 할 평가 같은 것들에
지배당하듯 시간을 보냈다.
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해왔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 평범함을 버티기 위해
무언가가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 조용한 물음들을 외면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고,
아무런 외부의 자극도 없었는데—
나는 그 물음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에게 너무 오랫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켰다.
오래 쓰지 않던 문서 프로그램을 열고,
무엇을 적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저 하얀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손가락은 가만히 멈춰 있었고,
생각은 뒤죽박죽 흘러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정리되지 않은 마음 속에서
한 문장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괜찮지 않다.”
그 문장은
너무도 솔직했고, 너무도 당연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항상 '괜찮다'고 말해왔다.
누가 물어도,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답했고,
힘든 날도 그냥 지나가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넘겨왔다.
그게 내가 배워온 방식이었고,
버텨온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을 썼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더 이어 적었다.
“나는 말하고 싶다.”
그 말은 소리 내어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늘 마음속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으며,
어디서부터 멈춰 있었는지를.
그 글은 정리가 잘 된 글이 아니었다.
문장이 중간에 끊기기도 했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날, 아무 일도 없던 날은
내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인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회복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 조용히 쓰기로 했다. 매일 한 줄이라도,
내 감정의 흐름을 따라
나의 말로 나를 적기로 했다. 그것이 문학이 아니어도 좋았고,
누군가에게 닿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오늘도 써 내려간다. 그 첫날의 문장을 기억하며. “나는 괜찮지 않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