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태풍이 이곳에만 횡포를 부린 듯 하루아침에 이랑은 여기저기 무너져 내렸고, 고구마가 통째로 뽑혀 나뒹구는 모습을 황망한 기분으로 구경할 때, 옆에서 이웃은 단번에 단언하더군요.
“멧돼지가 다녀갔구만, 쯧쯧. 멧돼지가 속 썩이는 건 죽여야 해결 돼. 사냥꾼 불러.”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사냥꾼은 또 어떻게 부르나요. 도와달라 소리치면 산에서 튀어나오나요. 아, 다행히도 군청에 알아보면 된다는군요. 그래도 대뜸 전화해 사냥꾼을 찾으면 좀 이상하지 않나 걱정했는데, 전화 건너 김 주무관님은 곧바로 사냥꾼 연락처를 알려주었습니다. 생각보다 그를 찾는 이가 많나봅니다.
사냥꾼에게 전화를 걸고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사뭇 긴장됐습니다. 사냥꾼이라니. 단지 고구마 농사를 짓고 싶은 거였는데, 멧돼지 정벌까지 나서야 한다니요. 덫에 걸려 으르렁 이빨을 드러내는 멧돼지, 총알을 장전한 사냥꾼. 이런 건 계획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다행히 그리고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쩌죠. 교황님이 한국에 오신대서 당분간 총 못 쓰는데….”
“네(교황님과 멧돼지가 대체 무슨 상관)? ”
사냥꾼 말에 의하면 상황은 이랬습니다. 멧돼지는 워낙 힘이 세서 덫으로 잡기 힘들다. 돼지 머리에 총알을 명중해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당분간 총을 사용할 수 없다. 왜냐? 교황님이 한국에 오셔서 지금은 전국 총기 사용 금지 기간으로 지정됐다. 모든 설명을 마치고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더 힘 빠지게 했습니다. “고구마, 옥수수는 멧돼지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안타까워서 어쩐대요….” 아, 교황님.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왜 하필 지금 한국에 들르셨나이까.
고구마는 처음 도전한 밭 채소입니다. 이웃의 추천 때문이었죠. 키우기 쉽고,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니 팔기도 쉽다는 게 이유였는데요. 그 지역의 기후도,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한 채 농사에 달려드는 이들에게 이웃은 막강한 인플루언서입니다. 옳다구나! 그의 한 마디에 덜컥 300평 밭 가득 고구마를 심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곧바로 오일장에서 고구마 모종을 사다가 셋(저와 동료 둘)이서 이틀에 걸쳐 심었습니다. 그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며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자리엔 새 모종을 심고, 고구마 새순 하나하나와 눈 마주치며 물조리개로 물을 줄 때, 팔은 빠질 것 같아도 매일 다르게 크는 모습을 알아차리는 데서 희망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죠. 보통 평당 8kg는 수확한다고 하니, 300평이면 못해도 2,000kg다. 흙먼지와 피로를 샤워로 털어내며 배시시 웃는다면, 그 2,000kg의 값어치에 대해 셈하고 있었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해 고구마 농사는 대실패였어요. 2,000kg는커녕 100kg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끝내 멧돼지를 잡지 못했거든요. 사냥꾼은 안타까웠던지 덫을 놓고 밤새 잠복까지 하며 노력해주었지만 번번이 놓쳤습니다. 밭 둘레에 그물을 설치해도 그쯤이야 멧돼지에겐 들이받으면 그만이니 소용없었죠. 그새 고구마 무한리필 맛집으로 소문났던지 밭을 찾아오는 멧돼지는 점점 늘어만 갔어요(‘맛’집이라 쓴 건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키운 고구마가 맛있긴 했나보죠). 그나마 무사했던 고구마마저 차례로 뽑혀나가는 걸 애태우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처음엔 한 마리만 오더니 점점 멧돼지 일가가 함께 외식을 오나 봐요, 허허.”
갈수록 많아지는 멧돼지 발자국을 가르키며 머쓱한 듯 농을 치던 사냥꾼 아저씨. 그날 이후로는 서로 민망해서 연락을 그만두었습니다.
멧돼지를 욕하는 것도 지칠 때쯤 이번엔 고라니를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고라니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멧돼지 때문에 설치한 그물에 몸이 끼인 채로요.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지 그물은 살 깊숙이 파고들어 죽은 고라니의 목을 여전히 조르고 있었죠. 터진 살점, 피와 뒤엉긴 그물을 사체에서 분리하는 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또 다시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았으면 해서 묻어줄 구덩이를 깊이 파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그러는 동안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체를 뒤덮는 파리 떼를 보면 소름이 끼쳐 억지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는 것. 사체를 들어 구덩이로 나를 때, 생각보다 쉽게 들려서 그 가벼움에 놀랐다는 것. 묻어주고 나서도 며칠 동안 사체의 지린내가 유령처럼 지독하게 따라다녔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멧돼지를 한 번도 맞닥뜨린 적은 없어도 고라니는 종종 목격합니다. 추수가 끝난 텅 빈 논을 가로질러 껑충껑충 뛰어가는 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구경하다 저렇게 시원하게 활보하던 애를 내가 그렇게 죽인 거구나. 이어 도착하는 감정은 기괴합니다. 어떤 동물은 사랑하면서 어떤 동물은 죽었으면 바랄 수 있다는 건 농사를 짓는 내내 겪는 정말 괴상한 감정이에요. 내가 쳐둔 그물에 걸려 죽은 고라니가 세 마리 째 됐을 때, 그러니까 무엇을 죽이기로 계획하지 않아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목격했을 때 유기 농사를 짓는 일이 생태계를 살리는 일이라는 거창한 기대부터 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뒷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떠올랐죠. 멧돼지, 사냥꾼, 그물을 거쳐 사체의 지린내까지 전부요.
“어디 감히 멧돼지 새끼가 인간 사는 데 와가지고는. 한 발만 쏜 거 보니까 한 방에 죽었나보네.”
이웃의 말을 들으며 이어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어젯밤에 나는 트위터로 남의 집 고양이를 보며 예뻐했는데, 멧돼지는 위험하니까 죽어도 슬플 것 같진 않다고. 그래서 미안해졌습니다. 귀여운 걸 사랑하는 일은 쉽고, 무서운 걸 죽이는 일도 인간에겐 만만하다는 것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