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아침에는 과연 밤새 내린 이슬이 살짝 얼었습니다. 햇빛이 비칠 때면 잎에 내려앉은 서리는 촘촘히 엮은 은빛 비늘로 보이죠. 점점 가까이서 구경하다 얼마나 차가울까 꼭 손가락을 대보고 싶어집니다. 체온에 닿자마자 서리는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주욱 물방울을 떨굽니다. 서리였던 것이 손목을 따라 소매 안까지 흘러 들어가면 차가워! 호들갑을 떨며 급히 닦아내고요.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그제야 번쩍 깹니다. 이 서리를 따다가 아직 자고 있을 친구 발바닥에 갖다 대면 나보다 더 놀랄 텐데 하는 상상이 찾아와서 피식 웃고 맙니다. 이번엔 입을 동그랗게 벌려 ‘하아-’ 길게 입김을 뱉으며 미리 겨울 기분을 내볼 수도 있죠. 겨울은 슬그머니 오고 있습니다.
떨어진 은행 열매로 거리가 얼룩지고 고린내가 진동하는 즈음이 얼추 상강입니다. 느닷없이 찬 기운이 잦아드는 이맘때 밭농사는 실상 끝에 달한 셈인데요. 추위를 잘 견디는 김장 채소 이를테면, 배추나 무 정도를 제외하고 고구마, 땅콩 등 대부분은 찬 서리가 닿기 전에 수확하기 때문에 상강이 지나면 밭은 단출해집니다. 밭에서는 상강이 계절의 경계를 알리는 마감일인 거죠. 벼 바심(곡식의 이삭을 거두는 일)을 끝내고 돌아서 고구마, 생강, 토란까지 연이은 수확을 치르고 나면 제 몸과 마음은 이미 한해를 마무리하는 자세가 됩니다. 밭이 조금씩 비어가면서 할 일이 넘쳤던 하루가 덩달아 느슨해지고, 긴장은 헐거워지기 때문일까요. 한해가 어떻게 지나갔던지 회고의 시간이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속아 넘어가지 말자. 작년부터인가 자주 다짐하는 노동의 태도입니다.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건 확 내키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제안을 두고 마주하는 기분이죠. 이건 무리일 것 같은데? 단번에 직감했으면서도 어차피 돈이 필요한 참이긴 했지. 또는 오, 재밌을 것 같아! 따위 이유를 들면서 힘들겠지만 하면 할 수 있겠는데? 묘하게 설득되는 선택. 그걸 조심하자고 되새깁니다. 그 끝에는 늘 머리를 쥐어뜯으며 대체 왜 하겠다고 했을까! 역시 무리였는데! 후회의 눈물을 흘렸으니까요. 다짐까지 하는데도 쉽지 않습니다. 한눈에 봐도 딱 별로인 일 정도야 걷어차기 수월한데, 골치 아프게도 세상엔 확 티가 나게 나쁜 일보다 복잡하게 별로인 일이 더 많고요. 이정도면 나쁘지 않지 할 만한 모호한 일은 번번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겁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이런 대사가 갑자기 어디서 굴러 나온 걸까 생각해보니 출처는 여기예요. 딸려온 기억에서 엄마는 13살의 나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뒤였나 동네 사진관에 필름 현상을 맡기러 가는 길에 제가 그만 사고를 당했거든요, 무단횡단을 하다가. 보험사와 의사까지 모두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빽 소리를 지른 첫 마디가
“니는 그걸 꼭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 어디 함부로 도로에 달려드노?”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 물으면 도로 한가운데로 막 달려가려는 13살은 답합니다. ‘빨리 달리면, 저 차보다 먼저 건너편에 도착하지 않을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경계에 서있으면서도 모호하고 아슬아슬한 일에 몸을 내던지는 습성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지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른이 되어서도 수두룩하거든요.
“이 퇴비 30kg야. 들 수 있겠어?”
“빈 땅이 새로 나왔대. 놓치면 아까우니 힘들더라도 해봐.”
“이 원고 좀 급한데, 다음 주까지 교정 봐줄 수 있을까?”
“네! 할 수 있어요!”
무리일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는 데에는 이후에 남을 돈과 능력에 대한 기대도 있겠지만, ‘이 정도는 해야지, 이 정도는 남들도 다 힘들어.’ 식의 잘못된 평준화, 무리하는 걸 싫어하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도 한 몫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하고 싶던 일이니까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은 좀 멋있어 보였거든요. 열정을 논할 때 회자되는 인물들을 보면서 몸을 사리는 건 젊음의 자세로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 열심히 무리했습니다. 무리지만 그 정도 퇴비는 들어야 농사일 하지, 농사짓고 싶다더니 좋은 땅이 나왔는데 왜 안 해? 그래, 난 할 수 있어.
하지만 감수하는 무리가 열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을 때,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약점이 되고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처음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호기롭게 시작한 일들이 결국 ‘끝까지’ 맡은 바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리고,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일 역시 나를 갉아먹는 건 마찬가지. 무리가 쌓일수록 내가 원하는 건 결국 무엇이었는지, 어느 쯤에 멈춰야 하는 인간인지 알기까지 더 멀리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적고 보니, 관계 맺기에도 적용되는 전제네요.
숨을 헐떡거려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보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올해는 선방했습니다. 일을 벌이고 싶을 때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을 받을 때마다 자주 염두에 두었거든요. (무리)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속지 말자. 이러다 나의 세계가 좁아지는 건 아닐까, 차선의 기회조차 내게 오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도 합니다만, 차선과 무리를 걷어내고 최선에 집중함으로써 좋아하고 싶은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어 편안해졌습니다.
아직 밭에는 무와 배추가 토실토실 커가는 와중이고 자잘한 밭일이 남아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었던 풀 뽑기와 물 주기, 서둘러 일어나야만 했던 아침은 이쯤에서 뒤로 하고 긴 동면에 어서 들어가고만 싶어요. 이럴 땐 1년이 10개월이면 좋겠는데, 12개월인 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반성하고 시도할 수 있는 2개월이 아직 남았다는 데 안도하며 노동에 대한 다짐을 돌아봤습니다. 상강이니까 이제 슬슬 접고 들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