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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연 Oct 15. 2020

기억력 나쁜 이들을 위한 변론

"언제? 언제? 우리가 그런 델 갔었어?"


공부할 때 암기하는 능력은 괜찮은 편이지만(밑밥),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능력은 저히 떨어진다.


친구들은 자신들과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무척 서운해한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한다 생각는 걸까.


남편도 연애시절 나의 부족한 기억 때문에 여러 번 허탈함을 느꼈다. 잘해줘도 기억을 못 하니 소용이 없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나쁜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남편이 실수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이 얼마나 좋은 와이프인가?


싸울 때 증거 부족으로 몇 번 당하고 난 뒤로는 핸드폰에 그의 잘못을 적어놓고, 친구들과의 카톡창에 실시간으로 나눴던 그의 뒷담화를 검색하는 스킬을 활용하기도 한다.


기억력 나쁘다는 건 의외로 나에게도 좋은 점이 많다. 힘든 일도 잘 잊어버리니 남들보다 과거의 상처가 더 잘 아무는 것 같고, 심지어 그 힘들었던 일에 다시 도전할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남들은 이런 날 보면 참 속 편하게 산다고 말하곤 한다.




기억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모 채널의 PD 직군 최종면접에서의 일이다. 글을 쓰 기획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해서 PD가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몇 번 나가보곤 정말 혀를 내둘렀지만...


이전 면접까지는 준비한 대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며 박수를 받기도 하고 합격 길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최종면접이 기억력 테스트일 줄이야! 과거의 일이토록 많이, 집요하게 물을 줄은 몰랐다. 특별했던 추억도 아닌, 인생 중대사도 아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었다.


'조별과제를 할 때 힘든 게 뭐가 있었나요', '잘 기획해서 칭찬받은 과제는 뭐가 있었나요', '과제에 잘 참여하지 않는 조원에게 뭐라고 말하며 격려했나요' 이런 질문들이었는데(이것도 확실하지 않음 주의※) 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힘든 것도 없었고, 특별히 기억나는 과제나 격려도 없다. 내게 과제는 그저 과제였을 뿐. 떠듬떠듬 뭉뚱그려 말하다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당연히 떨어졌다.


어제의 일도 아니고, 지난 주도 아니고, 내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던 일도 아닌 일인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억을 하지?


남편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내가 어떤 범죄에 휘말려서 범인으로 오해를 받으면 난 정말 감방 갈지도 몰라... 기억이 안 나서 대답을 제대로 못고, 실수로 말이라도 번복하면...(말하다 보니 아찔)"




요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좋지 못한 내 기억력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좋은 에세이들을 읽으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참 찰지고 재미있게 묘사하던데, 나는 그런 소재를 많이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남편은 기억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자신이 죽어도 누군가 자기를 기억해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낫다고. 기억해주는 게 정말 그렇게 의미가 큰 일이다니.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크상관없을 것 같은데. 기억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저 사는 동안 잘 사는 게 최고라는 생각. 너무 낭만 없? 


친구들과의 추억도, 남편이 해준 과거의 이벤트도 지금의 수다거리가 되어 함께 웃을 수 있 것 아닐까. 과거보다는 지금 당장의 함께 하는 한 시간, 작은 말 한마디가 더 고 소중하다.


하지만 이렇게 꾸준히 글을 남기다 보면 내 좋지 못한 기억력도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나중에 기억이 안 날 때 읽어보면 생각이 나겠지. 하지만 그때의 난 읽지 않을 것 같. 그때의 인생을 즐기느라. ㅎㅎ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또 즐기에 기억력이 부족한 것 아닐까. 그냥 타고난 장기 기억 능력이 떨어진다고 인정하는 게 더 쿨 해 보이고 낫나. 어쨌든 주변에 기억력 나쁜 사람이 있어도 애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 겁니다. 저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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