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크 Nov 25. 2020

존대보다는 하대

중요한 손님을 위한 식사를 대접 시 주의사항이 있다. 식사 장소는 미리 예약하고 당일에 무조건 재확인을 하며 식사 중 스마트폰은 매너 모드로 설정한다. 약속 장소는 손님이 없는 식당보다는 유명한 식당으로 정하는 것이 현명하고 식사법이 까다로운 음식은 대화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함으로 피해야 한다. 식사 에티켓 중 제일 기본은 적절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다. 장소와 상황에 맞는 옷을 코디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비즈니스 식사 에티켓은 직장인의 필수교육 사항이다. 사업 관련 계약 중 많은 건이 식사시간에 성사된다고 한다. 격식을 갖춘 공식적인 자리보다 사적인 공간에서 마음을 열어 대화를 하다 보면 어색했던 분위기는 풀리고 난항을 겪던 협상도 조금씩 진척된다. 나라마다 고유의 식사 에티켓이 존재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다 알고 실천하기에는 너무 많고 어렵다. 상대방이 멸시와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품위 있게 처신해야 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 양팔은 되도록 몸에 붙어 있게 두며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야지 몸과 입이 음식으로 가면 안 된다. 다시 배워서 역시나 서툴게 보일 거면 그냥 매사에 눈치 있게 행동하는 게 더 낫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자마자 아내를 따라 바로 영국으로 갔을 때다. 아내의 스승님이자 영국인 노부부의 식사초대를 받아 난생처음 외국인 집에 간 적이 있다. 남편인 나를 처음으로 아내의 지인에게 소개하는 날이라 조심스럽고 설레는 날이었다. 그것도 영국인 어르신 부부라니! 당시 나는 영어가 서툴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을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아내는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나에게 여러 가지 영국의 식사 예절에 대해서 브리핑을 해줬다.


입에 음식이 있는 상태로 말을 하면 안 된다

나이프는 절대 입에 넣지 않는다

식사 중에 기침이나 재채기는 피하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것은 된다

멀리 있는 음식을 가져올 땐 직접 일어나지 말고 근처 사람에게 달라고 하면 된다


무엇보다 나만의 최고의 식사 에티켓은 입에 침이 마르게 영국 사모님의 음식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칭찬의 단어는 몇 개 안되었지만 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음식이 나올 때마다 항상' 땡큐'로 감사의 표현을 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도 아니고 원래는 'Sorry'의 나라다. 나중에 현지에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Excuse me'와 'Sorry'를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달고 살아야 되는 나라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영국은 나에게 'Thank you'의 나라였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식사하는 동안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무례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입을 벌려서 음식을 씹지도 않았으며 음료수도 소리 내어 마시지도 않았다. 그 땅 자체가 낯선 상태에서 식사 자리는 더욱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지만 고맙고 뜻깊은 자리였기에 나는 오감을 최대한 열어 눈치의 기술을 있는 힘껏 발휘했다. 사실 영국 사모님의 음식이 맛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 다과, 플레이팅에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분 모두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보였다. 나와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미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비록 깊이 있는 대화는 나 혼자만 나눌 수 없었지만 4명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듬북 받을 수 있었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손이 많이 가고 큰 맘을 먹어야 되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참으로 감사하다.




‘처갓집에 송곳 차고 간다’는 속담이 있다. 처갓집 밥은 꽉꽉 눌러 담았기 때문에 송곳으로 파야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처갓집에서 사위 대접을 극진히 한다는 의미인데 사위를 손님처럼 후하게 대접하면 결국 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내 딸에게 잘해주라는 무언의 압박인데 그냥 딸에게 직접 잘해주면 된다. 누구나 예상 밖의 환대를 받으면 감지덕지 어쩔 줄을 모른다. 환대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을 일컫는다. 보통 소중한 사람을 대접해야 되는 경우 1순위 선택은 ‘식사 대접’이다.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싫어할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직접 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했지만 요즘에는 담소 나누기 좋은 룸이 있는 한정식이 더 선호되고 있다. 장소도 중요하겠지만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든지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다른 나라의 정상을 만나는 모습은 TV 뉴스의 단골 장면이다. 국가 간 대접의 자리이며 모든 행사가 외교 의전에 따라 진행된다. 의전은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며 일반적인 의전은 국내외 VIP들이 국제 행사나 기업체 미팅을 할 때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절차를 따르도록 도와주는 밀착 서비스를 말한다. VIP에게 길을 안내하는 상황이라면 사선 방향 옆에서 안내하고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을 사용해서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VIP가 먼저 탈 수 있도록 잡고 기다리고 상석은 안쪽이며 안내자의 위치는 버튼 누르는 곳 앞이다. 자동차의 상석은 조수석 뒷자리이며 안내자는 운전자 옆에 앉는다. 의전 매뉴얼은 상황마다 다르며 복잡하다. 그러나 불변의 원칙이 있다. VIP가 원하면 어디든지 그곳이 바로 상석이 된다는 것이다. 의전의 기본은 상대방에게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평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VIP라고 생각하고 대접한다면 원만한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을 주겠지만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워 시도조차 꺼린다. 오히려 존대보다는 하대하는 게 더 쉬운 세상이다.




어느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시간적으로 꽤 여유가 있었다. 아침부터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구워서 먹어 볼까 해서 냉동고를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때마침 일어난 아내는 프렌치토스트와 야채수프를 원했고 아들은 오믈렛을 먹고 싶어 했다. 각자의 생각은 달랐지만 한 가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되도록 설거지 그릇이 적게 나오면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해서 먹자는 것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모조리 꺼내보니 마침 잔멸치 볶음, 장조림, 우엉조림, 파프리카, 감자볶음, 김자반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반찬을 잘게 잘라 따뜻한 밥에 참기름을 넣어 고추장 또는 간장 비빔밥을 먹으려고 하다가 잔멸치 볶음과 장조림이 각각 메인으로 들어간 주먹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밥에 살짝 볶은 재료를 넣어서 섞었다. 밥의 온도가 어느 정도 따뜻해야 재료와 골고루 섞이고 잘 뭉친다. 한 입 크기로 너무 세게 누르지 않으면서 동글동글하게 뭉쳐주었다. 간편하게 즐기는 꼬마 주먹밥이 완성되었다.



커다란 플레이팅 접시에 주먹밥을 골고루 예쁘게 담고 샐러드 야채도 살짝 얹어서 아내와 아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었다. 비주얼과 맛이 마음에 들었던지 아내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아주 근사한 요리'를 먹는 것 같다고 나를 잇따라 칭찬해 주었다. 아내의 감탄사와 엄지척은 기본이었고 감동받은 표정은 보너스였다. 아들은 주먹밥을 샐러드 소스에 연거푸 찍어 먹으면서 간단한 듯 거한 아침을 맞이했다. 자주 먹는 반찬 재료였지만 먹는 사람들의 입맛과 컨디션을 배려해 대접하니 시중에서 파는 그 어떤 요리보다 더욱 돋보였다. 과분하게 대접받은 기분이 들었다는 아내와 아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는 미소된장국이라도 잽싸게 끓여서 좀 더 풍성하게 대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속담에 ‘문전 나그네 흔연 대접’이란 말이 있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도 자기를 찾아온 사람은 친절히 대접하라는 말이다. 살다 보면 어른이라고 항상 대접받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대방에게 잘해야 자신도 대접을 받는다. 귀한 대접을 받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문득문득 과거에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철이 없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여전히 따뜻한 보살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나 또한 자기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남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배려도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몸에 익도록 연습을 해야 필요한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나오게 된다. 존중은 행동을 통해 나타나며 따뜻한 마음에는 인간미가 담긴다. 염려와 배려는 한 글자 차이인데 단어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나는 여전히 나의 감정만을 염려하지 상대방의 상황은 배려하지 못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노력한 만큼 대접을 받는다. 마땅한 예의를 갖춰 대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큰 리액션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는가? 아이를 키울 때 지나친 사랑은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어른에게 넘치는 배려는 독이 되기는커녕 기쁘고 즐겁다. 누군가 나에게 그리 해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과 관심이 그립다. 하지만 내가 먼저 타인에게 넘치도록 마음을 써야 결국 반의반이라도 나에게 돌아온다. 일방통행은 없다.

이전 13화 통증과 엔도르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