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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크 Apr 11. 2021

감정 컨트롤

며칠 동안 아들이 사무실에서 A4용지를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의식적으로 예의 주시하지 않아 계속 잊어버렸다. 집에서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사무실만 가면 아들의 요구사항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급하지 않은 일은 외면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또다시 까먹지 않게 문자메시지로 관련 내용을 보내 달라고 했다. 문자는 읽지 않으면 스마트폰 화면상에 계속 숫자로 표시가 되어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니 괜찮은 방법이다. 가끔 나는 전화하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마스크나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한참 동안 그것을 찾아 헤맨다. 생수를 배달시키려고 동네 마트에 갔다가 정작 생수는 빼고 생필품만 잔뜩 구입하고, 사무실 도어록 비밀번호를 기계적으로 누르다 보니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 순간 생각이 안 난다. 또한 허리에 벨트를 매고 있으면서 아침부터 어제 맸던 벨트를 찾는다고 온 집안을 들척대고,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옷이 안 보인다고 드레스룸과 세탁실을 시끄럽게 들락날락한다.



특히 멀지 않아 비밀번호의 시대가 종결된다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비밀번호를 까먹고 '비밀번호 찾기' 인증을 자주 한다. 로그인을 위한 아이디는 거의 동일한데 정기적으로 '안전을 위해 비밀번호를 변경해주세요'라는 메시지가 팝업으로 뜨면 나는 고민 없이 '다음에 변경하기' 버튼을 누른다. 괜히 바꾸었다가 기억을 못 해서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은 내가 자꾸 까먹으니 걱정이 된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이제 흔하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저하되고 뱃살만 늘어난다. 기억력 감퇴는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고 건망증과 같은 깜빡거리는 증상도 해를 거듭하면서 심해지지만 않으면 치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 치매 자가진단을 해서 치매가 의심될 때는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을 꼭 받아야 한다.




무언가를 검색하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을 띄웠는데 순간 검색하려던 단어가 전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 소위 '인터넷 미아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검색 목적을 잊어버리고 다른 링크로 옮겨 다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현상을 말한다. '뭐 검색하려했지'의 연관 검색어가 '아 그 뭐더라'와 '그 뭐냐'가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일이 사람들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건망증과 비슷한 증상으로 단기 기억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의 단기 기억은 다른 정보가 치고 들어올 때 또는 외부에서 자극을 받으면 튕겨져 나간다. 옆에서 느닷없이 누군가 말을 건네고 전화벨이 울리면 우리의 단기 기억은 이내 사라진다. 디지털 시대 우리는 자녀의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번호도 헷갈린다. 스마트폰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검색하거나 단축키를 눌러 전화통화를 하다 보니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편리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다 보니 두뇌의 활동량은 떨어지고 기억력은 감소했다. 스마트폰에 패턴을 걸어놓고 기억이 나지 않아 대리점이나 서비스센터에 가서 초기화를 시킨 경우도 있다.


  

"기억이 정말 안 나요? 왜 까먹을 수 있죠?"라는 아들의 질문은 중년이 된 나에게 "어떻게 하면 기억이 나게 할까요? 까먹지 않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로 바뀔 때가 되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면 스마트폰 캘린더나 카드 결제 문자메시지, 카톡 대화창을 꼼꼼히 훑어보면 된다. 또한 지난주에 무엇을 먹었는지 알고 싶으면 반찬가게에서 보내주는 오늘의 메뉴 메시지와 배달앱 결제내역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시간이 촉박한 중요한 일은 스마트폰의 알람 기능을 활용하면 아주 좋다. 또한 초행길에 주차장을 이용할 경우 스마트폰으로 주차된 구역 넘버를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유용하다. 무엇보다 뇌를 활성화시켜 기억력을 개선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반복해서 외우는 연습을 하고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으로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도 기억력에 도움이 된다. 또한 드라마나 예능보다는 다큐멘터리와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아는 길이라면 내비게이션을 끄고 기억을 되살려 운전하는 것을 권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엄청나게 잘해준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내가 남에게 조금 잘한 것만을 기억하는 나의 기억력은 개선의 여지가 부족하다.

 


인간의 기억력은 20대 초반에 절정을 이루는 반면 이때부터 건망증이 시작된다. 이러한 기억력은 50대까지는 잘 유지되다가 60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감퇴기에 접어든다. 두뇌의 기억용량은 굳이 숫자로 설명하지 않아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은 5~9개이고 단기 기억으로 머무는 시간은 20~30초라고 한다. 인간은 학습한 것을 1시간이 지나면 절반으로, 한 달 후에는 80%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무엇이 오래갈까? 르네 헨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어서 생존에 필요한 순간을 최우선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즉, 나쁜 기억이 더 오래간다는 말이다. 위험한 순간에 느낀 공포심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대신 비슷한 상황에서 이러한 경험을 떠오르게 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는 있다고 하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아 평생 시달리는 것은 탐탁지 않다.



미국 속담에 '코끼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돼지와 돌고래처럼 코끼리도 기억력과 지능이 뛰어난 동물 중 하나인데 코끼리는 같은 무리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을 기억하고 오래전에 방문했던 장소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육지동물 중 가장 큰 두뇌 크기를 가지고 있고 뇌의 무게가 5kg으로 인간의 뇌보다 무려 4배 이상 무겁다. 또한 인간이 아닌 동물 중 유일하게 동료의 사체를 보며 장례의식을 치르는 동물로 유명하며 반복학습을 통해 거울 속 자신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러나 코끼리도 인간처럼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고 한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기억력이 좋으면 무슨 일이든 수월하게 할 줄 알았는데 이면에는 이런 아픔이 존재한다.



살면서 보았던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인간의 기억력이 완전하지 않은 게 인간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다. 한 번 본 숫자와 단어, 자신이 봤던 장면을 모두 기억한다면 뇌는 단 1초도 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은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다. 인간의 뇌는 시시각각 대량의 정보를 처리한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약 40분의 1 밖에 안 되지만 몸 전체 에너지의 약 25%가 뇌에서 소비된다. 기억을 오랜 시간 보존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필요 없는 기억까지 뇌에 저장한다면 인간은 에너지의 고갈 위기에 빠르게 직면할 것이다. 니체는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래 간직해서 좋을 것 없는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는 것이 몸과 마음에 이롭다. 지울 수 없는 기억도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잊어지는 것에 대해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몰입이 필요한 순간에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방해 요소라면 당연히 제거되는 것이 낫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쓸데없는 기존 기억은 사라져야 한다.




뇌과학자들이 말하길 나쁜 기억 중 나쁜 감정만을 지우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끔찍한 기억을 회상하고 그 순간 나쁜 기억 회로가 활성화되면 회상된 기억이 다시 회로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순간적으로 방해하는 약물을 투여한다는 것인데 이런 경우 다른 기억까지 훼손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결국 기억과 감정은 함께 오는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기억 그 자체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인 듯 싶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만 출 것 같지만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앞서가는 다른 선수들에게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에만 신경 쓰기 위해 참았던 시간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낙담했던 순간들, 무엇보다 매 순간 긴장이 되어 입술이 바짝바짝 탔던 모든 기억들이 꽁꽁 묶어놓았던 자신의 감정과 함께 한꺼번에 폭발한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한다는 것은 잘한다 못한다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 상태를 평소 면밀히 체크하는 것이 필요한데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자신의 감정이 왜 그런지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컨트롤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감정보다 이성이 자신을 지배하게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컨트롤하고 주위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의 감정이 컨트롤이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해야 한다. 자신이 어느 상황에서 어떤 말 때문에 그러한 감정을 느꼈는지를 글로 적어보고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바로잡기보다는 애초에 그러한 감정상태가 되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야 한다. 때로는 자신과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장에 쓰고 다시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정도 함께 의식적으로 없애는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자책하지도 말고 제삼자나 소중한 사람에게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기억 문제로 인한 불편함이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기억 못 하는 것들 속에는 딱히 나쁜 감정은 없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건망증 때문에 실수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군가의 감정에 컨트롤 문제가 생기면 서로 간에 말을 줄이고 잠시 쉬는 타임을 갖는 걸 권한다.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는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잠시 동안 다른 것에 집중을 해서 긴장을 풀도록 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억누르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하면 오히려 이득이다. 오늘 하루의 가치는 얼마만큼 자신이 이러한 에너지 낭비를 잘 막았는지로 판가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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