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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크 Nov 30. 2020

더 기다리라고?

야생 짐승을 사냥하고 열매를 따서 생활하던 시대에 인간은 하루에 적은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잤다. 부족과 친족의 생존을 위해 수렵채집으로 얻은 양식은 비축하기보다는 즉시 소비와 분배가 이뤄졌다. 이후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식량이 풍족해지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재산의 축적이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노동과 휴식의 확실한 구분은 사라졌고 여가 시간은 줄고 일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갔다. 한번 늘어난 노동시간과 노동량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거운 삶의 짐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왔다. 어느새 자연이 가져다준 수확의 기쁨은 사라진 채 인간은 치열한 생존 경쟁 위에 서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대부분 아파트에서만 쭉 살다 보니 과일나무를 볼 일이 별로 없다. 시골에만 가도 제법 과실수가 많은데 확실히 도시에는 보기 드물다.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살펴보면 의외로 아파트 단지 안에 과실수가 많은 걸 깨닫게 된다.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아파트 단지 안에 감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가 서로 경쟁하듯 탐스러운 열매를 뽐낸다. 마트에 진열된 과일만 보다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과일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자연 체험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안에 과실수 열매는 아파트 공공의 재산이므로 개인이 함부로 채취해서는 안 된다. 익어서 땅에 떨어진 열매는 주울 수 있으나 대부분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 심은 관상수이기 때문에 일반 나무를 보호하는 독한 농약 살충제를 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열매를 따서 직접 먹을 수도 없으며 일부 도로변 과실수 열매는 자동차 매연 때문에 중금속 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심어져 있는 감나무, 모과나무의 열매가 보기 좋게 영글어 가는 것을 더 이상 감상할 수 없는 11월 중순이 되면 아파트 입주민의 동의와 관리사무소의 주관으로 입주민은 눈치를 안 보고 마음껏 열매를 딸 수 있다. 1년 중에 단 하루만 허락된다. 매년 과실수 열매 따기를 하기 때문에 특별히 과실수는 친환경용 농약을 살포하여 관리한다. 먹을 간식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과실수 열매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도심에서 수확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매년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한번 수확의 깊은 맛을 본 사람들은 매년 이때만을 기다린다.



몇 년 전 이 행사를 처음 참여했을 때 나와 아들은 집에서 굴러다니는 청소 걸레 막대기를 하나 들고나갔다. 행사 당일에 참여한 입주민들이 다 같이 모여서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데 우리의 장비가 제일 보잘것없었다. 당연히 열매를 따기도 힘들었고 나와 아들의 서투른 손놀림은 초보 티가 팍팍 났다. 또한 어렵게 딴 모과는 모두 다 상처가 나서 금방 썩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워하는 아들을 달래 주었지만 나의 승부욕은 이때부터 불타올랐다. 그다음 해부터는 '최신 만능 열매 따기 3단 장대'를 하나 구입해서 완전무장을 하고 나갔다. 3단까지 피면 총길이가 대략 5미터가 된다. 길이 조절도 쉽게 되어 높은 가지에 달린 과일을 상처하나 안 생기게 딸 수 있다. 또한 탈부착이 가능한 주머니가 있어 모과가 쏙 하고 주머니에 들어가면 그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처음에 아들은 장대가 무거워 들고 있기도 버거워했다. 모과와 힘겹게 씨름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이 아들을 안쓰럽게 쳐다본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매년 기술과 힘이 붙어 내가 없어도 순식간에 모과를 딴다. 아들 발 밑에는 항상 모과가 수북이 쌓여 있어 행사에 나온 아주머니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드리면 무척이나 고마워하신다. 한번 따고 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되기에 아들은 이 날이 기다려지고 놓칠 수 없다고 한다. 장대를 3단으로 제일 길게 펴서 제일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모과를 딸 때가 아들은 기분이 제일 좋고 바로 딴 모과향이 코끝에 스며들어 몸 전체에 가득 번지면 고단했던 수확의 피로가 풀린다고 한다. 이미 수확의 기쁨을 즐길 줄 안다. 아파트 단지 내 과실수 열매 따기 하는 날은 이제 생일 빼고 아들이 1년 중에 제일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늦은 가을 토요일 아침, 아들은 주말임에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일 먼저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아빠의 스마트폰을 켜서 오늘의 날씨를 체크한다. 살짝 춥고 미세먼지가 있다고 해서 마스크도 챙기고 따뜻한 외투도 준비했다. 아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아내가 아들에게 어차피 오전 10시가 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일단 아침을 먹으라고 챙겨줬다. 아들은 빨리 나가고 싶다. 마음이 달아오른다. 재촉하는 아들 때문에 아내도 나갈 채비를 마쳤다.



매년 나와 아들이 행사에 참여했지만 올해는 나 대신 특별히 아내가 사진사 겸 아들의 보조로 투입되었다. 행사가 시작된 지 1시간 만에 모과와 대봉감이 담긴 파란색 큰 비닐봉지를 가지고 아내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못 생긴 모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잔뜩 나눠 주고 제일 예쁜 모과와 대봉감을 가져왔다. 모과 표면의 끈적한 즙액이 물에 씻겨 나가면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내는 행주를 물에 적셔서 모과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또한 손에 닿으면 쉽게 썩기 때문에 위생비닐장갑을 낀 채 모과를 다뤘다.



수확의 기쁨은 열매를 따는 순간뿐만 아니라 거실과 화장실 작은 소쿠리에 멋지게 놓여 있는 모과를 볼 때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내는 모과를 먹기보다는 방향제로 사용한다. 모과의 향기는 퀸스향으로 심신을 진정시키는 향기요법으로 유명하다. 모과는 호흡기, 기관지 등 목 질환에 효과가 좋고 관절염에 특효약이다. 또한 모과는 따뜻한 성질이 있어 몸 안에 습기를 제거하며 염증에 도움을 준다. 집안 가득 향긋한 모과 향기가 넘쳐나면 덩달아 우리 가족의 기분도 춤을 춘다.




기다리는 순간부터가 바로 설렘의 시작이다. 어릴 때 나는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발매되기를 기다렸고 친구들과 만화가게 갈 생각에 기말고사가 빨리 끝나기를 고대했다. 또한 나는 생일날 내가 바라는 선물을 받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고 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설렘이 가득했다. 어른이 된 나는 월급날보다 보너스 주는 날이 더 기다려지고 연말정산 환급금이 들어오는 날은 고기 먹는 날이다. 빅매치 축구경기를 볼 생각에 새벽잠을 설치고 연말 빅 할인 이벤트를 기다리며 쇼핑 목록을 정리한다. 요즘에는 배달앱 서비스가 할인쿠폰을 마구마구 프로모션 하기를 기다렸다 먹고 싶던 음식을 주문하고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주간 5% 할인 쿠폰을 발급하는 목요일을 기다렸다 식품과 생필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니라 기다리다 지침의 연속이다. 기다리다 보면 초조해지고 목이 마르며 야속한 마음에 원망이 커진다. 누구나 기대가 크면 좌절도 깊다. 이렇게 지칠 때 어떻게 다시 회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운동경기 중 선수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 감독은 대기하고 있던 후보선수로 교체하면 된다. 그러나 내 삶의 대체자는 없다. 나의 마음과 육체가 부상을 당해도 나를 위해 교체로 투입할 마땅한 선수가 없다. 혼자서 제풀에 지치고 열정은 전혀 샘솟지 않지만 시렁대며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켜야 한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 드는 시늉이라도 해야 더디게라도 회복이 된다. 장대비를 맞고 햇볕이 뜨거워도 어제를 딛고 오늘 하루를 일어서야 되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그 순간이 모여 오롯이 나의 인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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