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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크 Apr 07. 2021

사라진 신혼의 단꿈

아내와 나는 한국에서 결혼을 하자마자 신혼여행도 없이 이틀 뒤에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초 계획보다 너무 빨리 출국을 하게 되어서 지금 생각해봐도 어리둥절함과 감사함이 공존한다. 출국 비자 발급이 절차상의 이유로 늦어질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해결이 되었다. 정신없이 모든 것이 진행되다 보니 나의 런던 신혼생활의 초반 기억이 많이 희미하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아내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우리 부부가 런던에 도착한 다음날은 힘들었던 서울과 런던의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진정한 부부가 되어 함께 맞이하는 런던 신혼생활의 첫날이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시차에 적응도 안돼서 몸도 피곤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상쾌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즐거이 담소를 즐겼다. 



그렇게 신혼의 단꿈에 잠시 젖어있던 와중에 뜬금없이 내가 아내에게 종이 한 장과 펜을 내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의 결혼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야 돼! 지금부터 해야 될 모든 일을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서 빠짐없이 적어봐요!" 



아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남편인 나에게 깊은 의도가 있겠지 라는 생각에 나름 열심히 적었다고 한다. 다 적은 종이를 받아 든 내가 목록들을 하나 둘 체크해가면서 "앞으로 일어날 확률이 낮은 이것은 제외하고, 저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단기간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것 같으니 최우선 순위에 두고 신경을 써서 처리하면 되겠네!" 하면서 한참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때 아내는 '공대 출신의 남편이 일의 우선순위를 참 잘 따지는구나! 내가 결혼한 로맨틱한 남자는 어디 가고 대기업 출신의 상사가 나의 남편이 되었군"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로맨틱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아내는 다큐멘터리 시청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각자가 서로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당시의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했던 나는 감성적인 중년의 남자가 되었고 예술가적 기질의 아내는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서 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업무의 부담감을 분산하여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미이다. 이사 가기 전에 할 일과 이사를 간 후에 할 일이 다르듯 업무의 성격상 조금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급한 일에 지배받지 말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하다 보면 나머지 일도 가뿐히 처리할 여유가 생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먼저 해야 할 일의 목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적는다. 시간을 기준으로 단기와 장기로 나누고 각각의 목적에 맞게 따로 구별한다. 보통 오늘과 내일, 일주일과 한 달로 분류하고 직장, 학교, 집으로 구분한다. 다음 단계는 중요도에 따라 일의 순위를 정하는 것인데 상중하로 표시해도 되고 숫자로 번호를 매겨도 된다. 여러 개가 동시에 중요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기 힘들다면 같은 번호를 배정해도 된다. 



일단 어느 정도 목록이 구성이 되었다면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하지 말고 하나의 일을 완벽하게 끝맺는 습관을 갖도록 한다. 목록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고 상시로 체크하고 끝난 일은 체크 표시를 즉시 한다. 또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전체 목록에서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한 가지 일이 끝나면 잠시 휴식을 갖는 것이 좋다. 커다란 상자가 하나 있고 모래와 작은 돌멩이, 큰 돌멩이가 있다. 큰 돌멩이부터 상자 속에 넣지 않고 모래와 작은 돌멩이를 먼저 채우면 나중에 큰 돌멩이를 넣을 기회가 없어진다. 큰 일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임시로 대충 처리하면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어차피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가장 큰일은 한 번에 해치우는 것보다 조금씩 나누어서 하는 것이 낫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뒤로 미루지 않는 자세다. 머뭇거리지 말고 일단 실천하면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때가 있다. 실제로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신념이 생기고 열정과 노력이 더해지면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우선순위 정하기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적용된다. 게임도 전략을 짜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고수가 될 수 있고 벼락치기 시험공부도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짧은 시간 내에 공략할 포인트를 정해야 한다. 평소 공부를 어느 정도 해두면 내가 잘 푸는 유형, 나의 장단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약한 부분을 보충할지, 자신 있는 영역의 점수를 더 올릴지 판단할 수 있다. 우선순위는 자주 바뀐다. 따라서 시의적절하게 조정해 나가야 된다.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고 자기 일이 바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새로운 것이 바로 밀려오고 작은 일의 파도에 계속 휩쓸리다 보면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을 기한보다 앞서서 끝내면 마음이 잠시 가볍다가 이내 다음 일 때문에 마음이 또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인간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평생 빙빙 돈다. 해야 할 일은 짙은 먹구름처럼 다가오고, 하고 싶은 일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아름답게 왔다가 슬프게 사라진다.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초조해져서 해야 할 일을 제쳐 놓고 애먼 일을 하기 일쑤다. 할 일을 미룬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해치워 버려야 되지만 한번 마음이 얼키설키 엉켜버리면 만사가 귀찮고 성가시게 된다. 



찝찝한 마음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면 일어서는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이 걱정된다. 그래서 넓고 푸른 바다를 봐야 가슴이 트이고 만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나 보다. 그러나 사람은 할 일이 많으면 마음이 마구 꼬이고 할 일이 없으면 몸이 비비 꼬인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언제까지 실망만 할 수 없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하길 “지혜로운 사람은 우둔한 사람이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을 즉시 해치운다”라고 했다. 우물쭈물하다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쓸데없이 지나간 일을 들춰보다 상처만 깊어진다. 기력이 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을 권한다.




사무실 근처에 한우직판장이 있다. 신선한고 품질 좋은 한우 암소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소고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어 위장을 보호한다. 또한 단백질과 철분이 풍부해 뼈와 근육의 발달에 도움을 준다. 아내는 특히 아들의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해 소고기가 들어간 반찬을 자주 만든다. 소고기를 듬뿍 넣어서 미역국 또는 소고기 뭇국을 끓이거나 야채와 같이 볶아 불고기, 찹스테이크를 해서 먹는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은 부드럽고 연한 부위의 안심을 좋아한다. 얇게 썰어 살짝 구워서 먹어도 담백하면서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고 3cm 이상의 두툼한 두께로 만들어 반쯤 익혀도 한우 본연의 감칠맛과 촉촉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오래 익히면 부드러운 맛이 사라지고 질겨지기 때문에 센 불보다 중불이나 약불에 지그시 구워서 안심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다.



하루는 아내가 안심 스테이크 맛있게 굽는 법을 유튜브로 공부해서 요리를 해준 적이 있다. 대충 구워서 먹어도 안심은 맛있지만 그날은 전문 식당에서 먹는 그런 맛이 났다. 화력이 좋은 오븐도 두꺼운 팬도 없이 아내는 오로지 정성으로 제대로 된 맛을 선보였다. 또한 고기를 굽고 남은 기름과 육즙을 이용해 정통 스테이크 소스를 직접 만들었다. 아들과 내가 깊은 풍미를 가진 소스에 안심 스테이크를 찍어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칭찬을 하니 인정을 받아 기분이 좋은 아내가 다음번에는 더 맛있게 구워주겠노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나의 칭찬 한마디에는 맛있는 스테이크를 구워줘서 고마워라는 진정한 감사가 포함되었고 칭찬을 들으니 힘이 된다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는 인정을 받은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인정받으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꽁꽁 얼어붙었던 내면의 고드름이 녹기 시작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마음이 뿌듯해진다.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면 일을 대하는 태도가 역시 바뀐다. 조금 더 깊게 그리고 전문적으로 알고 싶고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등한시하던 책도 다시 찾아보게 된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포부가 생기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이 무엇인지, 얼마만큼의 노력을 해야 되는지 스스로 따져보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 어느 날이었다. 거실의 높은 선반 위에 맛있는 초콜릿이 놓여있었는데 너무 높아서 내가 아무리 팔을 뻗어도 손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달카닥거리며 의자를 옮겼고 의자 위에 올라가 까치발을 하였지만 여전히 그곳은 멀게만 느껴졌다. 포기할까 망설이다 마지막 심정으로 안방에 있던 베개를 하나 가져다가 쌓아 발돋움을 만들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초콜릿을 꺼내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순간은 이런 베개처럼 나를 한 뼘 높게 올라가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멋진 사람이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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