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이번 겨울에 눈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나는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절로 눈이 녹기를 기다렸지만 언제나처럼 나의 간절한 바람은 응답 없이 되돌아왔다. 속수무책으로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도 나는 집안에 있어 그나마 무사태평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잔뜩 쌓인 눈이 내 마음으로 겁도 없이 밀려왔다. 밤새 녹은 눈이 얼어 도로는 빙판이 되었고 나의 사무실 건물 앞은 쌓인 눈으로 소보록했다. 삶이 그렇듯 어제는 순탄했지만 하루 만에 나는 곤란해졌다. 운 좋게 구입한 넉가래로 나는 건물 주변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힘겹게 치웠다. 한참 뒤에야 몸이 뻣뻣하게 경직됨을 느끼고 가벼운 체조라도 하고 시작할 걸 후회했다. 눈은 점점 사라지고 흥건한 땀만 나를 찾아왔다. 폭설처럼 코로나 나그네가 갑자기 들이닥쳐 주인 노릇 한지도 어느덧 1년이다. 성장은 논할 수도 없고 생존이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분노와 설움이 겹쳐 얼어붙었고 쉽게 녹지 않는다. 태연하게 넘어가던 것도 누적된 피로 때문에 성난 파도로 돌아온다. 고스란히 감정이 노출되면 새로운 갈등과 묵은 아픔만 동시에 밀려온다. 우리 마음에 제설제가 필요하다. 얼어 버린 나와 당신의 마음을 녹여줄 관심과 배려가 절실하다.
방관은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방치, 묵살, 수수방관, 좌시 등과 비슷한 말로 사용된다.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직접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면 옳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평소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상당히 무책임한 태도다. 그러나 곤란한 상황에 빠진 타인을 간접적으로는 도왔으나 직접 나서서 돕지 않고, 불의를 보고 몸이 굳어 잠깐 주저했다고 가해자와 방관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을까? 길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남의 일에 끼어들다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방관은 분명히 이기심이 내포된 행동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일단 말을 아끼는 게 낫다. 상황에 따라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될 때도 분명히 있다.
'남의 참견 말고 제 발등의 불 끄지'라는 속담이 있다. 즉, 남의 일에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자기의 급한 일이나 먼저 해결하라는 말이다. 주제넘게 남의 일에 간섭하다 일을 엉클어뜨리고 국면이 점점 악화되기도 한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은 아이를 삐뚤어지게 만들고 강한 반발심을 일으킨다. 보다 못해 간섭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아이의 기초 학습 능력이 떨어지면 향상을 위해 부모는 순차적인 방법들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녀가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저하되었다면 식생활의 개선과 규칙적인 운동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취해진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누군가의 간섭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자식을 무조건 방임하는 것도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이처럼 세상은 당위성과 현실성, 필연성과 가능성의 여러 개의 톱니바퀴들이 삐걱대며 섞여 돌아간다. '적절하게 방관하면서 효과적으로 간섭하는 법'을 이론으로 배운다고 중요한 순간에 그대로 실행할 수 있을까? 위급할 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평소와는 달리 기지와 용기가 생겨난다.
주변 상황이 갑자기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냥 지나쳤더라면 눈에 아른거리지도 않았을, 어물쩍 뒤돌아가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그런 경우다. 보다 못해 간섭을 하다 마음이 시원섭섭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얼어붙은 마음이 한 번에 사르르 녹는 때가 있다. 나는 어느 주말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외갓집에 놀러 간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차 바로 옆에 큰 RV (Recreational Vehicle) 차량이 한대 주차되어 있었고 여느 때와 달리 사람은 없고 차량 옆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너무 거리낌 없이 문을 한껏 열어 놓아서 차량 주인이 자동차 청소나 짐을 옮기도 있겠지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급하게 이동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아들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를 하고 아까 그 차를 쳐다봤다. 여전히 차 문이 열려 있고 왠지 모를 비정상적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들의 한 마디에 꽁꽁 숨어있던 오지랖이 발동되었다. 아들은 나에게 "왜 차 문이 열려있죠? 그냥 전화해봐요?"라고 툭 던졌다. 순간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차 앞 유리창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통화 중이었는데 잠시 뒤 해당 차주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사뭇 긴장한 듯 경계하는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같은 동 주민인데요. ○○○○차량 차주 되시죠? 몇 시간 전부터 차량 옆문이 계속 열려 있는데 빨리 내려와서 닫으셨야 될 것 같네요."
순간 차주가 의아해하다가 바로 상황이 파악된 듯 연거푸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 같다. 철벽 같던 그의 경계가 갑자기 풀림과 동시에 나의 찜찜함도 저 멀리 사라졌다. 얼어붙은 누군가의 마음에 한 줄기 햇살이 쏟아졌다.
우리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망설일 때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망설이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거나 밝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거나,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경우, 아예 답을 알지 못하는 상황,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때문에 후회할까 봐, 열등감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몹시 망설이게 된다. 특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하기 힘들 때 망설이게 되는데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고르지 못해 어려워하는 심리 상태를 '결정 장애'라고 한다. 결정 장애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경우는 점심메뉴를 선택할 때와 옷을 고를 때이다. 결국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친구나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고 관련 정보를 최대한 검색해서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선택의 문제 앞에서는 부담이 가중된다. 큰 비용과 책임이 수반되는 선택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며 주저한다. 도덕적 기준이야 어느 정도 명확하지만 선택의 기준은 주관적이며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당시에는 만족했던 선택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는 선택으로 바뀌기도 한다. 평소 나는 그냥 선택하지 않고 항상 조건을 따지고 타당성을 입증하려 애쓴다. 완벽하려다 오히려 망설이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배달앱을 켜서 한참 동안 무엇을 먹을까, 배달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할인은 안되나 검색하고 고민만 한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결국 집에 있는 것을 대충 먹자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매 끼니때마다 그런다고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르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두 개 모두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서로 앞서거나 둘 다 선택하기 극도로 싫은 경우도 있다. 가끔 하루만이라도 본능에 따라 망설임 없이 행동하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면 어떨까? 우리는 너무나 습관적으로 본능을 억제하는데 그것도 능사가 아니다. 살다 보면 대부분의 합리적 선택이 모두 좋게 귀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