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때문에 힘들때

관계를 유형화하고 평가해보자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

고대 아리스토탈레스의 말이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홀로 살 수 없고,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고 스킨십도 필요하다.

지하철 방송에 언급되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누군가는

장애를 갖거나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이 역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의 <닫힌 방>에서 나온 말이다.

길에서 재수없이 엇나간 사람을 만나 감정이 상할 때도 금새 지옥에 빠지긴 매한가지지만,

깊은 지옥은 물리적 공간이 가깝게 지낼 수 밖에 없는 누군가

혹은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했던 누군가로부터로 시작된다.


사람에게는 인정욕구가 있다.

아르스토탈레스의 말도, 샤트르트르의 말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이라는 지옥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비추며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어한다는 실 때문이다.


이 놈의 지옥은 예고없이 훅 아들지만

유통기한이 있는 관계면 깜박박 예고를 했을지도.


존 D. 록펠러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면 하늘아래 다른 어떤 것보다 값을 지불하고

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부리는 것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바로 어떤 이와의 관계를 내 삶에 우의에 둘지, 시간과 돈을 투자할지를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오늘날 그 능력은 바로 Relational Intelligence, '관계지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최근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경우 아쉬움과 답답함, 배신감을 느끼는지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만족할 수 없는 관계에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내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그 사람은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를 좋아할 이유도 사실은 내가 사람에게 느끼는 매력지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와의 관계는 우연히 발급받은 쿠폰이거나

입금만 가능한 출금불가인 통장 같은 것이다.


내가 멘토링을 해주고 감정과 보살핌을 줘야하는 관계는 다소 일방적이다. 나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나에게 내가 원하는 공감과 이해와 혹은 그 무엇을 해줄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혹시 친구로 생각하는가? 친구란 자아를 가리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이다. 나에게 자아라는 것은 나의 성향, 가치관, 태도, 적성, 인격의 발현이라는 키워드와 가깝다.

조심해야 할 점은 대체로 우리나라에서의 친구는 "특정한 시기"를 보낸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라고 오해한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것은 동년배나 동창이지, 친구의 개념과 다를 수 있다. 친구는 지금 나의 캐릭터를 이해하고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


나는 어쩌면 그에게 편한 잠옷 차림과 맨얼굴은 보여줘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어떤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고, 어떤 이상적 사회관을 갖고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와는 친구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멘토나 감적적 보살핌을 주는 관계인 것이다.

관계에는 좋고 나쁨으로 설명되지 않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은 관계의 유형일 뿐이다. 너무 한 가지 유형을 고집하지 말고

어떤 유형의 관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와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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