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둘 Mar 29. 2023

선몽대에서

[수필]



 아, 모래밭! 김소월의 은빛 반짝이는 모래밭일까.
일행들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솔바람 사이를 가로질러 그 강가에 섰다.

    우리는 낙동강에 가 보고 싶었다. 굽이쳐 흐르던 그 사구(沙丘)가 끝없이 이어지던 강줄기를 따라가는 백사장을 거닐어 보고 싶었다. 자연의 얼개를 알고 싶어 하던 목마른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여행단은 어느 날, 낙동강 지류를 따라 올라가 보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경북 예천군 어느 솔밭 앞이었다. 먼발치에서 보이던 큰 소나무들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소나무들은 위압하듯 하늘을 막고 서 있다. 그들의 거죽은 거뭇거뭇하고 껍질이 떨어져 반들반들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굵직하면서도 우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기운이 솔숲 가득 넘쳐났다. 꽃향기에 비할 수 없는 솔의 향이 그 일대를 뒤덮었다. 그러는 사이, 침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의 영(靈)들을 만났다. 소나무들은 긴 세월 동안 여기 서서 무엇을 보았을까. 솔숲을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 푸른 위엄 속에서 인간이란 한갓 남루한 쪽배 같은 신세라는 것을.


  저 멀리 반짝이는 무엇이 보인다. 아, 모래밭! 김소월의 은빛 반짝이는 모래밭일까. 일행들과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솔바람 사이를 가로질러 그 강가에 섰다. 마침 바람이 동으로 불다가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무와 풀들과 강가의 금싸라기를 데려와 코끝을 간질여 주었다. 


  순정으로 빛나는 저 눈부신 모래밭! 그 사이로 길디길게 흘러내리는 물결! 우리는 어느새 신발을 벗고 있었다. 설겅설겅 하염없이 발이 빠지는 모래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리는 들떠 허둥댔지만, 몸은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앞으로 급히 나아가려다 모래 속에 묶인 발 때문에 휘청거렸다.


  강물에 발바닥이 닿자 온몸에 찬 기운이 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올라온다. 모래알들은 누군가의 방문을 오래 기다려온 듯 와락 달려들어 발등을 감싸 쥔다. 그러더니 어느새 발등과 발가락 사이를 굴러다니며 장난을 친다. 일행들은 발가락 사이로 들이치는 모래알들이 발을 간지럽게 한다고 투덜대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다. 어린아이들처럼 웃는 우리들의 얼굴이 이 내성천의 물 색깔과 똑 닮았다. 누군가 말한다. 


  “이런 곳에 ‘흰수마자’가 사는구나.”      


  깨끗하게 흐르는 물에서만 사는 이 물고기 보기는 사실상 하늘의 별 따기다. 사람들이 강물에 들어가면 재빨리 모래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물이 흐르지 않게 되면 내성천의 물은 고여서 썩게 된다. 그러면서 이 모래밭 사이로 풀들이 돋아난다. 그 정도 되면 녀석들은 더는 이곳에서 생명을 이어가지 못한다. 강물과 모래밭이 사라지면 생명을 잃는 것이 어디 흰수마자뿐이랴, 우리 모두 돌고 돌고 돌면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사랑하는 관계 아니던가.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이름다운 만남 또한 영원히 사라져 버릴 터이다.  

   

  강 중간까지 가서 우리가 걸어온 솔숲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일제히 놀랐다. 우리 눈앞에, 솔숲 가장자리 절벽 아래, 마치 신선이 거기 있을 듯한 아름다운 정자(亭子)가 서 있지 않은가. 



 누군가 아리랑을 불렀다.
그러자 하나둘씩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동이
함께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선몽대(仙夢臺).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꾸고 지었다는 그 정자가 멀리 있는 발치서 우리를 근엄하게 지켜 보고 있는 것이다. 아, 저토록 수려한 정자일 줄 몰랐구나. 바로 이 내성천 백사장 명사십리(明沙十里)가 한눈에 보여 감동을 주었다던 곳, 학식 깊은 선비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읊었던 우리의 옛 쉼터, 퇴계 선생이나 수많은 선비의 친필이 전해져 내려져 온다는 유구한 역사의 이야기들이 숨 쉬는 곳…. 바로 그 때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누군가 아리랑을 불렀다. 그러자 하나둘씩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동이 함께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우리는 낙동강에 왔다. 내성천에 왔다. 그 물에 발을 담그며 선몽대를 바라본다. 내성천 물결 위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아리랑은 선몽대의 기둥까지 올라갔다가 누각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면서 우리를 심연(深淵)으로 이끌었다.

   바람 따라 저 너머로 조금씩 조금씩 넘어가던 아리랑은 끝나지 않으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의지로 아름답게 생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바람의 소리가 될 뿐이었다. 어떠한 소리도 멈춘 이 잔잔한 강에서 선몽대를 향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마음과 서러운 아리랑의 노래곡조만이 오래오래 선몽대와 솔숲과 이 백사장에 넘쳐흐를 뿐이었다.     


  선몽대를 바라본다. 우리 겨레의 장구한 세월만큼이나 인내한 정자의 저 기둥이 눈물겹다. 이 아름다운 모래밭이 운다. 우리와 같이 운다. 강바닥 모래 알갱이들이 우리 발등을 잡으면서 서럽게 운다. 그럴 적에 눈시울 적시던 내 마음은 어느새 솔숲 바람처럼 나부끼며 시 한 수 읊는다.   


  

 ‘강이 운다. 선몽대야 너는 이 강물의 울음 들었느냐,

  솔숲이 운다. 선몽대야 너는 소나무들 울음 들었느냐,

  구름아, 하늘아, 이 빛나는 모래들아, 너희도 울음소리 들리느냐,

  우리의 것을 지키지 못해 울고, 

  우리의 것을 다시 볼 수 없어 울고

  우리는 이제 우리이지 않아서 울고, 

  다시 못 뵈올 그 옛날 신선이 그리워서 운다.

  선몽대야, 우리의 아리랑 노래를 들었느냐

  내성천아, 우리의 아리랑 노래를 들었느냐

  서러워 운다. 비통해 운다. 

  다시 우리 언제 이곳에 오려나.

  다시 우리 언제 바람이 되려나, 눈물이 되려나….’  


   

  이제 강물은 마를 것이다. 흰수마자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 명사십리 백사장이 마르면 강 한가운데까지 마른 흙먼지가 날릴 것이다. 

그리하여, 강은 흐르기를 멈출 것이다. 이 강물을 흐르게 해야만 선몽대도 산다. 

강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을 것이니 곧 이 언덕은 죽음의 사구(沙丘)가 될 것이다.    

 

 모래밭 사이로 길디길게 흘러내리는 강물…. 

선몽대를 바라보던 아리랑 곡조의 마지막 울음을 뒤로할 때까지 우리는 말 없이, 말없이 서 있었다.    








이제 강물은 마를 것이다.
흰수마자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 명사십리 백사장이 마르면
강 한가운데까지 마른 흙먼지가 날릴 것이다. 
그리하여, 강은 흐르기를 멈출 것이다.

         

----------------------------------------------------------------------------------------------------------

*흰수마자 : 한국의 고유종으로 낙동강 수계에서만 알려진 특산 어종. 낙동강 상류 여울의 돌덩어리 사이에 숨어 살며 민첩하게 이동하고 돌 사이에서 가만히 머물기도 한다. 2012년 5월31일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선몽대 :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李閱道)가 1563년 창건한 정자. 정자를 짓기 전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꾸었으며,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운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전 21화 석탑 위의 푸른 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