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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수월루(水月樓) 누마루에서

[수필]



고택 앞 다리 앞의 황토물이 넘쳐날 듯 아슬아슬한데
나는 오히려 느긋해져서
불 켜진 기와지붕 너머 수월루 누마루를 찾아본다. 

 이미 그곳은 안개 속에 갇혀 현실에는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수월루(水月樓)의 누마루가 좋았다. 도포나 치맛자락을 끌며 올라서는 마룻바닥이. 발끝 살짝 들어 올려 그 마루에 건네면 곧이어 연회가 시작될 듯하다. 객(客)을 맞이한 고택(故宅)은 바람을 끌어오고 구름을 데려와 신선(神仙)의 연주를 준비한다. 


  대청마루를 지나 걸어오는 객(客)의 간결한 걸음세는 사바세계를 이제 막 건너 넘어오는 듯 진중하다. 

 수월루 누마루에 이르는 길은 참고 참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라 하는 인욕(忍辱)의 길.

  옷섶 여미며 한 발 두 발 속세의 세상을 걸어가는 번뇌의 길. 

 네모반듯한 연못은 나뭇결의 끝 지점쯤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넘어선 연화(蓮花)의 세계. 

 바닥 나뭇결 사이로 연잎이 아스라이 손짓하니 그때 산 너머에서 일제히 날아든 까마귀 떼가 연못 속 둥근 섬을 몇 바퀴나 돌아간다.


  메마른 겨울의 누마루에 서서 여름 연못을 상상하고 돌아오는 걸음이 허탈했다. 

 무슨 연유로 찬 서리 내리는 계절에 신록의 풍경을 상상한 건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언제고 여름에 다시 찾아보리라 하고 아쉬운 마음 달래며 겨우 도시로 발길을 돌렸더랬다. 

 작년 겨울 귀애정(龜厓亭)*을 찾았던 일이었다.      


  어느덧 한 여름이었다. 다시 그곳으로 가려 짐을 꾸리니 경북지역에 호우주의보 문자 메시지가 뜬다. 

 아직도 세상은 바이러스로 시끄러운데 재난예보는 나약한 인간들을 더 공포에 떨게 한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삶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를 일깨워주는 존재가 선조들의 집이다. 


  지붕이며 기둥, 마루는 재료 자체가 자연이며 자연 그대로의 기운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옛집은 인간을 내치는 일이 없다.

 새집에 들어가 시멘트 알러지를 일으키는 일도 자연의 열린 기운을 차단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내려진 또 다른 재난일지 모른다. 

그런 근원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도시의 삶을 재난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선조들의 집은 헐떡이는 인간의 숨을 한소끔 잡아준다. 

 도시 생활을 잠시 밀쳐놓고 고택에 이르면 이번 생을 끝내고 마루로 환생한 나무들이 더운 몸을 툭툭 쳐 준다. 

 그 바닥에 앉으면 어느새 등뼈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맴돈다. 

 전생의 나무는 죽어 다시 태어나 사람의 오장육부를 양생시키며 생명 활동을 돕는다.

 그렇게 가쁜 숨 서서히 잦아들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영천으로 향했다. 

 고택 앞에 도착하니 먹구름이 저 멀리 보현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고택 주인장이 집 안에서 나오길래 귀애정에 잠시 머물러도 되겠느냐 여쭈어보니 그렇게 하라 하며 곧 큰 비가 올 것 같다며 하늘을 쳐다본다. 

 주말 민박 손님을 받고 있어서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 순간,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섬광이 지상을 강타한다. 

 잿빛 구름이 귀애정 지붕 위에 딱 걸려 꿈쩍하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수월루 앞에는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위험, DANGER’라 적힌 비닐줄이 몇 겹으로 둘러쳐져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위험을 감지한 모양이다. 

 어설프게 쳐 놓은 줄 안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고택 주인 마음 생각하고 물러 나온다. 

 누마루에 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야 말할 길 없지만, 귀애정 앞 나무다리를 밟고 지나오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정자에 이르니 기다렸다는 듯 번개 천둥과 함께 큰 비가 쏟아진다. 

 기세를 보니 금방 거두어질 것 같지 않다. 

 우산을 펼쳐 들고 사선으로 들이치는 굵은 빗방울을 피하다 한구석에 서서 우연히 바라본 수월루는 참으로 갸륵해 보인다. 

 수월루는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이 나무다리를 건너갈 때 누구든 축원해 주었으리라. 

 세찬 빗속 의연한 수월루가 거룩하도다. 


  빗방울이 연못 속에 떨어져 지상의 꽃으로 환생하는지고. 

 그 모습은 마치 광목*이 자신의 어머니가 지은 죄업을 듣고 놀라 통곡하던 모습과 닮았다. 

 그의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청하며 죄업의 과보를 받은 모든 이들이 다 성불(成佛)하고 난 뒤에라야 정각(正覺)을 이루겠다던 지장보살(地藏菩薩)*.

 그의 원력(願力)이 하늘에 가 닿을 듯 자비로 가득 찬 세계가 빗속 너머 저곳에서 시작해 온 세상으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어미를 향한 광목의 자비심이 이토록 큰 비로 화(化)하여 세상 악의 찌꺼기까지 말끔하게 씻어내려는 것인가.


  사방으로 비가 그렇게 들이쳐도 옷 젖는 줄 몰랐다. 

 연못 속 연꽃이 흙꽃이 되어가도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님, 어서 일어나세요. 잘못하면 집 앞 도랑이 넘칩니다.”


  키 큰 고택 주인이 멀리서 외친다. 


  “어서 나오세요. 집 앞 도랑에 물이 넘치면 차도 사람도 못 나갑니다.”


  고택의 흙 마당이 심하게 뒤집히고 있었다. 

 철벅거리며 마당을 지나와 대문간에서 되돌아보니 기와지붕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폭포 같다. 

 드디어 인욕의 세상이 무너지려는 것인가!     


  세찬 바람에 우산을 빼앗기고 온몸이 비에 젖었다. 

 고택 앞 다리 앞의 황토물이 넘쳐날 듯 아슬아슬한데 나는 오히려 느긋해져서 불 켜진 기와지붕 너머 수월루 누마루를 찾아본다. 

 이미 그곳은 안개 속에 갇혀 현실에는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 속에서 이 세상 업장(業障) 두터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던 광목의 기도 소리가 한없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철벅거리며 마당을 지나와 대문간에서 되돌아보니
기와지붕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폭포 같다.  
드디어 인욕의 세상이 무너지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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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루(水月樓) : 경북 영천 귀애고택의 누각.

*무간지옥 :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래, 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고 몹시 괴롭다는 지옥. 

*귀애고택 :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제162호.

*귀애정 : 귀애고택 내부에 있는 정자. 문화재 자료 제339호.

*광목 : 지장보살의 전생.

*지장보살 :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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