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복사(皇福寺)이야기 -
[수필]
부디 이 나라가 불국토로 장엄하게 해 주시기를,
신라가 영원히 번영하게 해 주시기를.
황복사 석조 신장들이 끝내 부처님의 힘으로 통일된 신라가
영원히 건재하기를 빌었다.
그때, 황복사 삼 층 석탑 위로 푸른 달이 떠 서라벌을 고루고루 비추어 주었다.
보름달이 세상을 포근하게 비춰주는 밤이었다. 여름 내내 뜨거웠던 땅의 열기가 식어가고 어느새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 뙤약볕에도 굳세게 자라준 이 서라벌의 들판이 황금빛으로 넘실대자 신문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너른 들판의 황금밭을 일구어준 어진 백성들이 고맙고 고마웠다.
오늘은 백성을 부처님이라 여기면서 그들을 경배하리라는 마음으로 감은사(感恩寺) 야간행차를 나선다. 선왕(先王)*께서 이룩하신 삼국통일의 위업에 갈음한 치적을 남겨야 한다는 신문왕의 무겁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선왕은 뼈에 사무치도록 백성과 통일된 나라를 사랑하시었다. 백성들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기에 군왕으로서 흠결 없으셨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통일국토를 지키겠노라며 동해의 용이 되리라 하셨던 선왕을 생각하면 가슴 벅차올랐다. 그러한 분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난 자신은 얼마나 복 많은 존재인가. 허나, 선왕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될까 경계의 몸짓을 풀지 못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왕의 자리는 허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좌에 오르려 서로 죽이고 죽이니 인간의 욕망이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지난날, 김흠돌*의 행위를 보았을 때도 권력을 향해 치솟는 인간 욕망은 허망한 것임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왕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다. 백성들을 위해 세상일을 고루 나누어 주는 사람일 뿐이다.
왕좌에 올라와 7년 만에 얻은 어린 두 아들 이홍*(理洪)과 흥광*(興光)을 대동하여 도착한 감은사. 왕의 명대로 대열은 조용히 절간에 도착했다. 어두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너른 들판에서 곡식들이 찰진 기운을 전해주어 마음만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래도 흔들리는 마음이란 어쩔 수 없어서 다시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왕이 전갈도 없이 절에 도착하자 감은사 주지가 급히 나와 머리 숙이며 합장한다.
그 밤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었던 그 감은사 금당 안에서
훗날 신라를 이끌었던 두 왕에게 전해졌던 설법 소리가
그렇게도 청아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대왕의 마중을 하지 못하였으니 불충이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왕은 말한다.
“제 불찰이지 어찌 스님의 불충이겠습니까. 어린 두 아이에게 법문 들려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아들 둘은 이제 겨우 다섯 살, 세 살 이지만 이미 절간의 고요함과 향 내음을 좋아하는 터였다. 그사이 벌써 아이들은 뒤뚱거리며 금당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왕은 왕비*에게 말한다.
“비(妃)도 들어가서 법문 들으십시오. 아이들이 어미 품에 안겨 있어야 안정될 것이니.”
왕비가 답했다.
“왕께서도 같이 들어가야지요.”
왕은 털털하게 웃으며 말한다.
“내가 들어가면 모두 내 눈치를 볼 터인데 어떻게 불법을 제대로 듣고 새길 수 있겠소. 들어가서 아이들과 함께 불법 들으며 마음을 닦아 보시오.”
그 밤이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었던 그 감은사 금당 안에서 훗날 신라를 이끌었던 두 왕에게 전해졌던 설법 소리가 그렇게도 청아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게송 소리와 더불어 목탁 소리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길길이 길어 올리려는 듯 청아하고도 깊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굳세고 아름다운 신문왕이 동해안에 잠든 문무왕릉 곁에서 무문관(無門關)*의 수행승처럼 푸른 용의 입김 같은 것을 서라벌 벌판으로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른 밤, 소년은 황복사를 거닐었다. 상복을 입고 있지만 의젓한 기품이 달빛 사이로 아름다웠다. 경내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뼈마디에 깊은 슬픔이 배어들었다.
‘아버님이 할아버님을 그리워했던 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까. 어린 시절, 감은사에 갈 때 아버님의 눈가는 늘 붉었지. 동해를 바라보던 아버님의 눈에서 떨어지던 그 사나이의 눈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훔쳐내던 아버님의 젖은 눈이 내 눈과 마주쳤을 때 나도 울고 있었지. 아버님이 물으셨지. 흥광아, 너는 어이 우느냐. 아버님 눈가에서 또 한줄기 눈물이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더 크게 울어 버렸지.
아버님이 그 품에 나를 안아주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 동해의 용이 되신 네 할아버님 품이 참으로 생각나는 밤이로구나. 나는 말했지.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저는 어찌 살겠습니까. 허허, 너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형도 있지 않으냐. 아직 살날이 까마득한 네가 어찌 먼저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 두 분이 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찌합니까 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번쩍 안아 올리시며 동해를 보며 말씀하셨지. 저기 저 바다에 할아버지가 너를 지켜주고 계시지 않느냐. 사람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몸은 없어져도 영혼만은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이니라. 너는 좋은 절을 지어 이 왕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기도하거라. 그리고는 아버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고….
승하하신 형님 전하와 어머님과 함께 이 석탑을 지어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해주셨지. 곧이어 형님 전하와 어머님마저 승하하시고….
이제 내 손으로 아버님과 형님 전하의 사리(舍利)를 이 석탑에 넣는 일이 끝났으니 왕국의 영원을 빌어야 하는 일만이 남았구나. 그 옛날 우리 형제의 손을 잡고 찾아갔던 감은사, 그곳 금당에서 설법을 들었던 일이 꿈만 같구나.
아버님께서 이르신 대로 왕실의 번영을 위해 이 절 이름을 황복사(皇福寺)라 칭하리라. 이 신라 왕실에 무한한 복덕을 기원하리라.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 전하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으리라. 돌아가신 형님 전하의 애달픔을 내, 이 황복사의 염불 소리로 달래주리라. 서라벌 왕실의 영원무궁을 기도하리라!’
아버지를 잃은 신문왕은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의 첫아들 효소왕 또한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온몸을 앓았다. 맏아들이 왕좌에 올라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매 석탑을 쌓아 올렸다. 그 탑은 신문왕이 아비를 그리워하며 지은 감은사 석탑과 모양이 닮아 있었다. 진솔하고 강인한 신문왕의 성격을 닮은 황복사 3층 석탑이었다. 그 탑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효소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이 왕좌에 올랐는데 신비롭게도 세 살 적 신문왕과 나누었던 일을 기억해 내어 상복을 입자마자 황복사를 증건(增建)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대여섯 살이었다.
아직 어린 성덕왕은 손에 조그만 금동불을 만지며 기도했다. 부디 이 나라가 불국토로 장엄하게 해 주시기를, 신라가 영원히 번영하게 해 주시기를. 황복사 석조 신장들이 끝내 부처님의 힘으로 통일된 신라가 영원히 건재하기를 빌었다. 그때, 황복사 삼 층 석탑 위로 푸른 달이 떠 서라벌을 고루고루 비추어 주었다.
저기 저 바다에 할아버지가 너를 지켜주고 계시지 않느냐.
사람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몸은 없어져도 영혼만은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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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 문무왕(文武王)을 일컬음,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왕.
*김흠돌(金欽突) : 신라 중대의 귀족. 김유신·김인문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모반을 꾀하다가 신문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비 :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
*이홍(理洪) : 신문왕의 맏아들 훗날 효소왕(孝昭王)
*흥광(興光) : 신문왕의 둘째 아들 훗날 성덕왕(聖德王)
*무문관(無門關) : 옛사람의 공안 48칙을 해석한 책. 중국 송나라 때의 중 무문혜개(無門慧開)가 설법한 것을 1228년에 제자 종소(宗紹)가 엮은 것으로, 선종(禪宗)의 입문서이다.
*황복사 추정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이 글은 황복사터 자료를 통해 구성한 필자의 상상적 산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