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STS가 필요한 이유
서양 과학사는 과학자들끼리만의 토론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신학자와 맞섰고, 뉴턴은 철학적 비판을 의식하며 이론을 다듬었다. 다윈의 진화론도 사회적·윤리적 논쟁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과학은 늘 철학자, 신학자, 인문학자의 비판을 받으며 스스로를 보완해 왔다. 바로 그 다층적 토론이 과학의 합리성을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한국에서 과학은 자생적 비판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 식민지 시기와 전후 개발 시대에 과학은 곧 근대화와 국가 발전을 의미했다. 과학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회적·철학적 전제 위에서 세워졌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무비판적으로 신뢰해야 할 권위로 자리 잡았다.
현대 과학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전문가 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 되었다. 검증은 학문 내부에서만 이루어지고, 외부의 철학적·사회적 비판은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대중에게 과학은 일종의 블랙박스로 남아 있다.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그 권위만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과학은 합리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맹목적 신뢰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과학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을 다시 사회 속에서, 철학과 인문학의 비판 속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STS(과학기술학)는 과학을 맹목적 권위로 두는 대신, 그것이 사회와 문화, 정치적 맥락과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학을 절대화하지 않고, 비판과 검증의 다층적 회로를 되살릴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STS는 아직 낯설고 학과도 드물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필요하다. 우리는 과학을 외부에서 수입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 과학을 우리 사회의 맥락 속에서 다시 비판하고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STS는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장이다. 과학을 맹목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다시금 살아 있는 토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STS가 필요한 이유다.
#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