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철학,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실천적 구성주의라는 이름
“나는 어떤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가진 철학적 사유의 방향성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정에 집중하고 구조의 기원을 탐색하는 내 사고방식은 분명 깊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이 구조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 불확실해졌다. 나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복잡함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일까.
과정철학은 세상을 ‘고정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성되고 변화하며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고통도, 억압도, 치유도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흐름 속의 결과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나의 CPTSD는 특정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와 반복된 패턴의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현재보다 ‘시작 그 이전’을, 문제보다 ‘문제 발생의 조건’을 탐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철학이자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다.
문제는 과정철학이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찰일 수 있지만, 실천의 기준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열려 있다. 당장의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은 흐름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에 가깝다.
이처럼 과정철학은 ‘이해’에는 탁월하지만, ‘개입’에는 불안정하다. 그것은 마치 예방의학처럼, 미래를 향한 사유지만, 지금 필요한 진통제와는 거리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비슷한 한계를 가진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며, 모든 기준은 구성된 것이라는 전제는 구조적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동시에, 모든 비판을 무력화시키는 함정에 빠지게 만든다. “그것도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말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구조 속에서 나는 느꼈다. “나는 그저 흘러가는 진리를 탐색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치료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아픈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구조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결과보다는 ‘발달 단계’, ‘환경적 조건’, ‘예방적 개입’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내가 과정철학을 사랑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철학은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철학은 구조를 다시 짜야 하며,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실천적 구성주의자(pragmatic constructivist)’라는 이름에 매력을 느낀다. 이 사유의 방식은 이렇게 말한다. 구조는 해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재구성되어야 한다.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현실을 바꾸는 기준은 필요하다. 모든 것은 과정이지만, 개입의 타이밍과 방식은 선택되어야 한다. 단순화는 위험하지만, 적절한 환원은 실천을 위해 필요하다. 이 철학은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고민한다. 그저 비판하지 않고, 그저 따르지도 않고, 만들어간다.
이제 나는 철학을 거창한 진리 탐색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철학은 실천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 나처럼 상처 입은 사람이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다시는 같은 상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 설계의 기술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이 철학이 옳은가?”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철학은, 누구를 살리는가?”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불완전한 실천으로도 충분히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철학한다. 그리고 살아낸다.
#20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