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일찍부터 흰머리가 나서 염색하는 것이 귀찮은 일이 되었다. 50이 넘으면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쉰 중반부터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과 잔소리를 외면한 채, 회색 머리칼을 날리며 당당하게 지냈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집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평소에 거울을 잘 안 보는 편이라 별생각 없이 첫 출근을 했다. 1학년 수업을 하러 교실 밖에서 기다리는데, 남자아이 한 명이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선생님, 밖에 누가 왔어요.”
“응 이제부터 너희들 안전수업 해주실 선생님이셔.”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교실 밖 복도에 서 있는 내게 쏠렸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아이들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때 그 아이가 또 말했다.
“근데,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그 순간 나는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당황하실까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첫날부터 선생님께 꾸중을 듣게 된 아이가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그때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담임선생님이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나이가 많으시니까 아는 것도 많으시겠지? 그러니까 너희들한테 더 잘 가르쳐주시겠지?”
아이들 사이에 갑자기 친밀하고 호감 어린 분위기가 몽글몽글 생겨나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의 한 마디가 교실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내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해결했을까?
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또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교사를 만났다. 도저히 교사 같은 느낌이 안 드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옆에서 하나하나 다 따라 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선생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여선생님은 나에게 진짜 교사란 어떤 사람인지를 단 두 문장으로 보여주었다.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줄의 문장, 한 마디 말이 사람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그날 이후 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일 때, 그분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을 가르칠 때 교사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후에도 그 반 수업을 할 때는 조금 일찍 가서 교실 앞에 서 있곤 했다. 그 선생님의 기분 좋은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해지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매번 그날 하루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하셨다. 오늘 수업할 과목과 준비해야 할 일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하셨다. 천방지축 1학년 아이들이지만, 선생님 말씀을 들을 때는 적당히 질서 있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 반 수업을 하는 시간은 늘 기대되고 즐거웠다 아이들은 전체적으로 활발하면서 집중을 잘했고, 질문을 하면 대답도 자신 있게 했다. 표정들도 밝고 구김이 없었다. 시간이 낭비되지 않으니 재미있는 이야기나 퀴즈 등으로 짜임새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 아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