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모처럼 동창을 만나러 나들이를 갔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털이가 요삐를 만나러 가는 데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개털이는 더 이상 요삐를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아내의 친구는 요미와 요롱을 데리고 나왔다. 사연인즉 요삐는 오래 투병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요미와 요롱은 어린 강아지가 같이 있으면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해서 요삐를 위해 입양을 했다고 했다. 아내와 친구는 여러 날 고생하다간 불쌍한 요삐 생각에 같이 징징 울었지만 이내 어린 강아지 두 마리의 재롱 덕에 금방 깔깔거릴 수 있었단다.
그날 아내가 동창을 만나러 걸어간 한강 자전거도로 갓길은 개털이 즐거워 깡충깡충 뛰어가던 길이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지열에 못 이긴 개털이가 네발을 쭉 뻗고 낙오한 길이기도 하고 아내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이날은 분홍색 담요에 싸서 유모차에 태워 아내가 밀고 갔다. 아내의 동창도 요미와 요롱이 어리긴 하지만 두 마리 건사하기가 만만치 않아 역시 유모차에 태우고 왔다. 겨울이지만 날씨는 많이 춥지 않았고 깨끗하게 맑은 날이고 아내와 동창은 모처럼만에 만나 정답게 대화할 수 있어 행복했고 어린 강아지 두 마리와 늙은 개털이도 햇볕도 쪼이고 싱그러운 강바람도 즐길 수 있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내의 친구는 요삐를 상실한 슬픔도 크지만 요미와 요롱을 통해 조금씩 즐거운 생활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고 아내는 노쇠한 개털이가 속상하지만 아직 비교적 건강하고 총명한 것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그런데 별안간 “이 마귀 새끼들” 하고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단다. 처음엔 아내와 친구는 자신들에게 하는 소리인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같은 소리가 다시 더 크게 들려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어떤 생면부지의 남자가 아내 일행에 손가락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단다. 나이는 오십 넘어 육십 초반 정도 돼 보이고 “예수천국 불신지옥” 류의 내용으로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전도를 하시는 분으로 보였단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아내와, 친구, 그리고 유모차와 강아지를 번갈아 가리켜가며 더욱 큰소리로 얼굴까지 붉히며 “이런 마귀 새끼들!”, “왜 마귀 새끼들을 사람도 아닌데 유모차에 태우고 다녀?” 하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아내가 나에게 여기까지 이야기할 때 이미 그녀의 콧구멍은 커졌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나는 당연히 아내의 편을 격하게 들었다. “성경 27서를 아무리 봐도 개가 마귀라는 대목은 없는 것 같던데?, 그분 뭐 착각하신 거 아냐?”라고 운을 뗀 뒤 객관적 입증 근거로 몇 년 전 함께 본 김윤석과 강동원이 주연한 영화 ‘검은 사제 들’을 예로 들었다.
그 영화에서는 새끼 돼지가 마귀로 나오지만 사실은 새끼 돼지가 마귀가 아니고 마귀가 새끼 돼지에게 들어간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 마귀 쓰인(마귀가 들어간) 새끼돼지를 제거하기 위해 퇴마사제인 강동원이 새끼 돼지를 품에 안고 한강 다리 위를 뛰는 장면이 나오는데 많은 여자들이 (마마귀가 씌웠거나 말거나 잠시 후 한강에 떨어지거나 말거나) 강동원의 품에 안긴 그 새끼돼지를 부러워했었고 아내도 주책없이 같이 부러워하는 게 마땅치 않아 영화 끝나고 외식도 않고 집에 와 라면 끓여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괜히 불똥 튈 우려가 있어 부정적인 기억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생략하고,
“돼지가 마귀라면 예수님이나 사제들이 돼지랑 싸우는 꼴이라 합리적 설정이 될 수 없다. 같은 논리로 개도 마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마귀가 돼지에게 들어간 바 있듯이 개에게 들어간다는 설정은 가능하다. 그러나 15살이 넘은 늙은 강아지나 2.5kg도 안 되는, 큰 쥐보다 작아 보이는 새끼 강아지에게 들어갈 마귀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마귀라도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오류에 기반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 무장한 여자들과 강아지들에게 언어폭력을 가한 것은 매우 잘못된 행동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라고 열변을 토했다. 잠깐이지만 아내의 눈빛은 행복으로 빛났다.
잠시 진정된 후 “그래! 그 목청 크고 천지 분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했어?”라고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당연히 참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 “누가 마귀예요?”, “우리가 (아내와 친구, 그리고 강아지 세 마리 포함) 아저씨한테 어떤 피해를 줬다고 욕을 해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아저씨가 마귀예요!” 등등의 내용으로 울먹이며 마주 고함을 쳤단다.
늙고 쇠약해 서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강아지가 마귀인가? 그런 강아지를 산책시키려고 한 내가 마귀인가? 평생 같이한 늙은 개를 오랜 시간 간호하다 어렵게 보내고 어린 강아지들에게 정 붙이려는 친구가 마귀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하루하루 쇠약해가는 개털 이를 보면 속상하고 우울해 모처럼 나들이 나온 내가 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불쾌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아내의 속사포 같은 절규에 뻘 춤 해진 그분은 비척비척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그 양반은 아내의 별명인 ‘삼 닭’이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의미 외에 과거 ‘쌈닭’이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그냥 ‘조그만 아줌마’로 쉽게 본 것이 임자 제대로 만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날 개털이의 유모차에는 목줄, 간식, 배변처리용 비닐봉지, 똥을 집기 위한 비닐장갑, 물휴지와 휴지가 실려 있었다. 요미와 요롱이 유모차에는 치석 제거용 개 껌이 더 실려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그날 내내 무척 불쾌하고 속상해했다.
위 사진 설명 : 마귀들.
이 사진은 봄에 찍은 것이다. 꽃그늘 아래 늙은 개와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좋아 어쩔 줄 모른다. 요런 걸 보고 마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발상은 내 사고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임에는 틀림없다.
유모차 탄 개털이.
힘들어도 콧바람을 쐬면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밖에서 제대로 걷질 못해서 딸아이가 유모차를 준비했다. 이날도 분홍색 담요를 깔고 개털을 유모차에 태워 아내가 밀고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