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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양이 CATOG Oct 30. 2022

나는 개양이다I am catog

존재감을 드러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alek70unc 

 Identity Reconstruction 정체성 재건축, 2018, Video

 

재활 치료를 어느정도 마무리를 하고 다시 캐나다로 향했다. 2018년 어느 날, 커뮤니티의 소식란에 광고가 하나 올라왔다. 토론토의 한 아파트가, 도시 재 건축으로 곧 폭파될 예정이라는 것. 아파트가 폭파되기 전, 토론토에 있는 아티스트들이 함께 모여 게릴라 페인팅 협업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갔다. 룰은 간단했다. 건물 빈 벽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되, 상대방의 그림을 완전히 지우거나 덮지 않고, 오직, 더해가며 그리기. 토론토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잔뜩 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작업을 보여주며 은근한 기싸움이 오고 갔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져간 검정 페인트 한 통으로 빠른 필력으로, 벽에 개양이를 그렸고, 문구를 적었다. 


Are you a Cat person or a dog person? I am CATOG. 

당신은 고양이과? 아니면 개과? 나는 개양이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한 아티스트가 말을 걸었다.

‘Can I mess it up?”

장난 좀 쳐도 돼?


“What do you mean by mess it up?”

장난친다는 게 어떤 건데? 


“If I say mess it up, I literally meant mess it up.”

내가 장난친다 했으면, 진짜 장난친다는 거야. 


 그리고 내 그림에 장난을 치겠다고 했다. 장난을 허락했다. 그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시작으로 수 백명의 아티스트, 지나가는 관람객들까지 내 그림에 무언가를 더하기 시작했다. 색을 칠하기도, 무늬를 더하기도,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변주에 신이 나서 그림에 계속 밀도를 더했다. 


 


위트 넘치는 어떤 한 아티스트는 이런 그림을 더하기도 했다. 


'Not a cat person'

나는 고양이과가 아니에요


 밤이 되자, 야광 물감을 더하기 시작했고, 야광 라이트의 빛을 받아  존재감을 더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뮤지션들도 오기 시작했다. DJ, 바이올리니스트, 젬배 아티스트. 그들의 즉흥 연주 음악의 기운을 주고받으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내려놓고, 젬배 연주에 합류했다. 



'덩덕덕 쿵더쿵'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휘모리 장구 가락이 여기서 쓰일 줄이야.  아프리카 전통악기인 젬베의 박자를 휘모리장단으로 받아치자 연주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이런 게 '신명'이라는 걸까? 소름이 돋았다.

 

한바탕 요란한 현장에 다녀간 누군가가 'HEAL' '치유하다' 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갔다.

내가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전달된 것일까?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쾅!!!!





 약속된 2주의 시간 후 건물은 폭파되어 이 해프닝의 흔적은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함께 어울려 '가득 채움'을 경험한 나의 정체성은 '완벽한 비움' 그리고 '진화'를 경험한다.


 완벽하게 채우고 비워서 또 새롭게 정체성을 재건축할 수 있을 듯 했다. 

이제 또 한 번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개의 집단에, 고양이의 집단에 완벽하게 소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보다는, 둘 다 일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기. 건강한 자존감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 힘을 스스로 인정하고,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경계를 스스로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열어놓는 상태인 것 같다. 스스로의 고유한 중심은, 바뀌지 않기에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되 그 중심부의 주변은 말랑말랑하고 유연하게 열어놓기. 내 주변의 사람, 환경에 곁을 주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함이다. 함께 어울려 논다는 것은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https://www.youtube.com/watch?v=dmalek70unc

당신은 개과? 아니면 고양이과? 나는 개양이입니다.

Are you a Cat person or a dog person? I am CATOG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정도의 유연한 감각을 열어놓는, 캐나다의 동료 예술가들, 그리고 그날의 관객들이 나에게 선사했던 소중한 경험 덕분에,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나와 비슷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예술적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활동명은 Vancorvid, 스스로의 음악적 상징 동물을 '새'라고 이야기하는 영국 아일랜드 출신의 뮤지션이다. 토론토에서 처음으로 스트릿 아티스트를 만나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주었던 그곳에서, 그녀는 이 모든 프로젝트의 음악적 시작을 알리는 연주를 했다. 내 그림 앞에서 DJ와 사전 협의 없이 즉흥연주를 벌였던 그녀가 바이올린 연주로 음악적 포문을 여는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아, 이 사람과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다장르 융합의 시대에 주류, 비주류를 나누는 것이 매우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전통적 방식의 기본기는 분명히 중요하다. 그녀의 선율에는 분명 단단한 클래식의 기본기가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었고 주류,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만한 음악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이 느껴졌다. 사전 협의 없이 시작된 DJ의 음악적 도전에 대해 

'그래, 어디 한 번 덤벼봐.'

라는 태도로 연주로 응수하는 모습에, 한 마디로 반해버렸다. 이날 프로젝트에서 다른 동료 예술가들이 내가 라이브 페인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Such a trooper'

완전 기병 같아.라고 말한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개성 강한 두 아티스트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카메라의 피사체로써도 아주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그녀는 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날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한국의 치맥을 가르쳐주겠다며 그녀를 한국 치킨집으로 데려갔다. 한국 치킨에 맥주의 조합은 진리의 조합이라며 그녀에게 소개했고, 치맥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아직도 내게


'Let's go for Chimaek sometime.' 

'치맥 먹으러 가자' 

라고 이야기를 한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날 치킨을 뜯으며 그녀의 음악 세계에 대해 듣는 기회를 포착했고, 그녀 역시 그녀의 음악적 여정이 치유 Healing에 방향성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치유와 힐링에 대한 관점 역시 매우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에게 치유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편안하게 감상하는, 그런 고상한 과정이 아니다. 나에게 치유의 과정은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는 과정과 같이 치열하고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은 여정인데


'Healing is fighting'이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정말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그녀는 주짓수 유단자에, 전 나이지리아 올림픽 국가대표 코치에게 기계체조 코칭을 받을 정도로 스포츠에 진심이다. 초등학교 시절 쇼트트랙 선수로 발탁돼서 선수 생활할뻔했던 경험과 얼마 전 복싱하다가 무릎뼈가 탈골된 경험을 하고 프로 선수들이 다니는 재활센터에서 2년간 재활을 했던  나의 경험은 스포츠맨십에서 공통분모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도 역시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을 건강하고 오래 하기 위해서다. 


 바이올린과 그림은 한쪽 어깨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운동으로 충분한 단련을 해야 건강하게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그녀 역시 오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음악을 그녀의 우울증 극복의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써 트레이닝을 받았던 점, 아이리시 정통 정신을 음악에 담으려 한다는 점, Interactive Media를 전공해서 다장르 간의 협업을 반긴다는 점 등 너무나도 많은 공통분모들이 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아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하여 캐나다에 살았던 기간까지 매우 비슷했다. 


 그녀는 그녀의 집안이 음악가 집안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세계 10대 뮤지컬 중 하나의 음악을 작곡한, 국제적 명성의 뮤지컬 음악 감독이고 언니도 바이올리니스트, 집안 자체가 전부 음악가 집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No way!! you left such a great music environment?'

'아니 이렇게 좋은 음악환경을 두고 왔단 말이야?'


라고 물었다.


"I like myself here. I'm sharp. I am who I am, I am strong. Also, as an artist, I'm looking for my kind of music."

'여기 있는 내 모습이 좋아. 훨씬 날카롭고, '나 자신'일 수 있고, 강인해진 내 모습이 좋아. 그리고 내 음악을 찾고 있어."


 너무나 공감 가는 부분이었다. 예술가들은 항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을 찾아 평생을 여행한다.


 그날의 프로젝트는 마치 꿈같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평소에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그다지 익숙지 않은 내가,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면 순식간에 당당해지는 모습에서 그래도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보통 다행인 일이 아니라고 오늘을 감사했다.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드러냈을 때, 이를 공감해줄 사람을 만났던 귀중한 경험은, 어쩌면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존재의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더 이상 부족한 부분을 숨기느라 힘을 다 빼지 않아도 되겠다는,  따뜻한 희망의 경험이었다. 










 익명의 어떤이가 마지막으로 개양이의 몸통에 크게

'HEAL (치유하다)'

라는 글자를 남기고 갔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흥겹게 놀았던 축제의 현장에서, 누군가 내 그림의 방향성을 읽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

.

.

 쾅! 



 약속된 2주의 시간 후 건물은 폭파되어 이 해프닝의 흔적은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함께 어울려 가득 채움과 진화를 경험한 나의 정체성은 완벽한 비움을 경험한다. 


 완벽하게 채우고 완벽하게 비워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재건축할 수 있을 듯 했다. 

이제 또 한 번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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