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인 슬픔'을 새롭게 정의하다.
Golden Dream-Ready to go 황금 꿈-갈 준비가 되다, acrylic on canvas, 909x727mm_ 2019
오랜 애증의 관계인 '만성적 슬픔', 나에게 왜 이런 감정이 찾아왔을까?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 한다며, 사치스러운 생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막상 겪고 있는 당사자들의 고통은 상당하다. 지나가는 말들에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이 이야기를 공감하는 몇몇의 사람들과 공유한 채 나는 조용하고 긴 투쟁을 계속해왔던 것 같다.
나를 침습하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대항하는 내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서서 칼과 방패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전쟁을 치르는 투사의 모습과 같았다. 사실 파도 앞에서 아무리 무장을 하고 대항을 해봤자 파도가 덮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만, 그래도 무장이라도 하지 않고, 대항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거운 갑옷과 조약 하고 대단한 무기의 무게에 잠식해버릴 것만 같은 깊은 불안과 공포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거센 파도와 갑옷과 방패의 무게에 깊숙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어긋났었음을 깨닫는다.
감정은 억누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오랜 방황 끝에 깨닫는다.
만성적 슬픔은, 스스로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의 아우성이자 신호이다.
왜 억누르는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해!'라는 외부에서 주는 책임감, 의무감을 스스로의 감정보다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우성치는 스스로의 감정들의 메아리를 스스로 따뜻하게 보듬기보다, 너는 까탈스럽다고, 너는 유난스럽다고 무시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또다시 그 녀석이 찾아올 때 지나친 책임감과 의무감은 이제 그만 조금 내려놓고, 투사의 모습도 내려놓고, 이제 그 유난스럽고 까탈스럽고 보드라운 마음을 돌보는 노력을 시작해본다.
'많이 힘들었구나?'
'고생했어. 이제 네 마음을 알아줄게.'
누군가의 돌봄을 바라는 마음도 내려놓고, 스스로 돌보는 노력을 시작해본다.
억눌린 감정이 도움을 요청하고있다.
감정은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돌보아야 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Ready to Go! 이제 더 신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