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라는 미덕

by perezoso

그간 제주도에 왔던 횟수는 기억나는 것만 해도 10번 가까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 매혹된 이후로 이곳은 국내 여행을 계획할 때 늘 1순위의 여행지였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던 나는 이번에 드디어 그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정적(靜寂)’이었다. ‘정적’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고요하여 괴괴함’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괴괴하다’를 또 찾아보니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고요하다’라는 뜻이란다. 바로 이거다! 내가 제주에 매혹되었던 이유는 바로 이 ‘괴괴함’이었다. 오감 중 유독 청각만 예민한 편이라 시끄러운 소리에 늘 민감하던 내가 이곳에 반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해안 근처에서 묵었던 때의 일이다. 가끔씩 출몰하는 돌고래 떼를 보기 위해 차로 오가는 이들은 가끔 보였지만 이곳은 유난히 조용하고 식당이나 카페도 많지 않은 동네였다. 날씨가 괜찮던 어느 날, 우리는 느지막이 차를 끌고 나갔고 일몰이 잘 보일 것 같은 조용한 해변 도로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차도 거의 없었다. 근처 빵집에서 잔뜩 사 온 빵과 커피를 돌로 된 식탁 위에 펼쳐놓고, 캠핑용 의자를 트렁크에서 꺼내와 앉았다.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조금 쌀쌀해지는 것 같아 긴팔 후드티를 가져와 입으니 기후에 딱 알맞은 상태가 되었다. 삼각대를 설치해서 사진을 찍고, 맛있는 빵을 먹으며 지는 해를 봤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떠들고 웃었다. 이곳은 우리만의 장소였다. 최고의 순간이라는 걸 그 당시에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또 다른 일몰 장면.

그 날은 이번 여행에서 드물게 날씨가 정말 좋았던 날이었고, 우리는 그 유명한 차귀도의 일몰을 보기로 미리 결정했다. 엉알 해변 쪽으로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바로 옆에 있는 수월봉으로 올라갔더니 거긴 뭔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결국 다시 자구내 포구 쪽으로 이동했다.(한마디로 최고의 일몰을 보겠다고 온갖 유난을 떨었다.) 근데 그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방파제 근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바라본 그 날의 일몰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점점 더 또렷해지던 섬의 윤곽, 바다에 길게 꼬리를 내며 붉게 타들어가던 해, 같은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지는 해를 말없이 바라보던 사람들...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거슬리는 소리는 하나도 없이 고요했다. 이 아름다움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들에게 왠지 동지의식 같은 걸 느꼈다. 해가 사라지고 붉던 하늘이 어둑해지자 사람들은 단번에, 모두 떠났다.

생각해보니, 소박한 기쁨과 평화로움을 느끼던 시간에는 늘 이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던 아침. 한라산이 펼쳐지거나, 서귀포의 섬과 바다가 보이던 숙소에서 테라스에 앉아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충만한 행복감이 차오르곤 했다. 대단한 전망이 아니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매일의 하루를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그게 그렇게 지나치고 사치스러운 바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낯선 생각들이 마음을 두드렸다.

숙소 주변에 있던 원앙 폭포에 걸어서 다녀온 어느 저녁이었다. 그냥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어떤 인위적인 건물도 없었다. 그저 확 트인 하늘이 있고, 열심히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계속 들리고, 나무와 꽃들이 있었다. 처음 보는 꽃들의 이름을 검색해서 여러 번 불러보았다. 조용한 평화로움이 가득한 저녁이었다.


제주에서는 사방이 조용하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소리들이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야자수 잎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나 파도 소리, 텐트 지붕 위로 비 떨어지던 소리(마치 불판에 고기 굽는 소리 같던), 가지각색의 예쁜 새소리들...

늦은 밤 아무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중산간 지역의 깜깜한 길을 차로 달릴 때나, 인적이 전혀 없는 올레길을 혼자 걸을 때에는 너무 조용하다는 것 자체가 무섭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시의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끊임없이 바깥의 도로로부터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사이렌 소리와 경적 소리, 아파트 다른 집 세탁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남편이 있는 방에서 들려오는 tv 스포츠 중계방송의 소음에 노출되어 있는 나는 제주도의 그 고요함,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하던 그 순간들이 참으로 그립다. 그것이 여기에서는 얼마나 드문 미덕인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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