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야기했듯이, 시간적 여유와 잦은 비로 인해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카페에 자주 방문했다. 카페 순회가 이번 여행의 테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예전에 3일, 혹은 5일 정도의 일정으로 제주도에 왔을 때는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는데 다니다 보니 이게 또 나름의 맛이 있었다. 그냥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을 만든 이의 취향과 감각을 경험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이런 즐거움을 여러 번 맛보다 보니 이에 비하면 커피 값은 너무 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사한 공간들이 많았다. 특히 나를 사로잡던 곳들은 개방감이 좋고 주변의 자연 풍광이 카페 내부에 잘 녹아든 공간들이었다.
먼저 소개할 곳은 서귀포 성산읍에 있는 <제주 커피 박물관 Baum>이라는 카페이다.
도로에서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들 사이로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단정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는 외관도, 내부 공간도 모두 숲에 싸여있는 분위기인데, 한마디로 숲을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긴 통창과 작은 창문들도 모두 주변의 나무를 더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실내 공간 옆에는 테라스 공간을 크게 따로 내어 야외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충분히 낼 수 있다. 전망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옥상 공간도 따로 있다. 카페 내부에는 해외의 여행지들을 찍은 사진들이 중간중간에 걸려 있고,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어 지루하지 않고 다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단지 인테리어를 위한 것이 아닌, 정말 읽으라고 둔 책들-만화책 포함-이 잔뜩 꽂혀있는 책장도 있었다. 여기에 와서는 제대로 푹 쉬다 가라고, 이 공간을 지은 이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오자마자 이 카페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와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는 이 근사한 공간을 혼자 독차지한 것만 같은 황송함을 느끼며 이곳의 모든 것을 맘껏 향유했다.
다음은 서귀포 안덕면에 있던 <휴일로(HUEILOT)>라는 카페이다.
이 카페는 올레길 8코스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들어가 본 곳이었다.
여기도, 그냥 최고다. 말이 필요 없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세 번이나 갔었던 곳이다.
높은 층고와 감각적인 인테리어. 공간 자체가 널찍하고 개방감이 뛰어나며 워낙 위치가 좋다. 서귀포의 바다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고 카페의 오른쪽엔 박수기정과 산방산이 보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건축이라고 해야 할까?
이 카페는 바다가 보이는 전면을 창문도 없이 아예 개방해놓고는 그 앞에 테이블이나 의자도 두지 않았다. 그 덕에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하늘과 바다와 소나무 몇 그루만으로 이루어진 끝내주는 전망이 완성되었다. 카페 내부, 넓은 앞마당과 옥상 등 카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충분히 넓다. 해가 쨍쨍하던 한낮부터 어스름해지는 늦저녁까지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고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제주에 와서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여기에서만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아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조천읍에 있는 <5L2F cafe>를 소개하려고 한다.
붉은오름 근처의 한라산 둘레길을 오전에 걸었던 어느 날, 지친 몸을 쉬어가고자 주변의 카페를 검색했다. 무슨 연예인이 다녀갔다던, 리뷰가 많던 카페는 직접 가보니 인테리어가 요란하고 영 마음이 가지 않아 다시 검색을 하여 찾아간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황토색 흙집의 외관과 큰 나무에 걸어둔 ‘5 Loaves 2 Fishes’라고 쓰인 팻말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카페들처럼 규모가 큰 카페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플랜테리어(planterior)’라는 말에 가장 걸맞은 공간이었다. 나뭇잎이 가득한 한쪽 면에 큰 창을 내고 내부에도 큰 화분들을 가득 두어, 지금 여기가 실외인지 실내인지 헷갈릴 정도로 숲 속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말린 꽃들과 작은 화분들,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소품들과 조명까지 어느 구석 하나 신경을 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수국과 이름 모를 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마당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가장 으뜸은 바로 커피 맛! 거품을 가득 올린 ‘뜬구름 커피’(시나몬 카푸치노)는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남편과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이 커피 맛을 계속 그리워하는 중이다.) 모든 재료는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다고 쓰인 안내문에서 주인의 뚝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좋은 취향과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공간이었다.
이외에도, 라탄 조명과 창밖으로 펼쳐진 녹차밭 풍경이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와 사방으로 난 통창으로 보이는 바다, 잘 관리되어 있는 정원과 나무들이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허니문하우스> 등 근사한 곳들은 여기에 다 옮기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운영 방식도 기존에 봐온 카페나 식당들과는 다른 곳들이 많았다. 커피 만들고 빵을 굽는 부엌 공간을 넓게 두고 손님들을 위한 자리는 상대적으로 적어 인상적이던 애월의 한 카페는, 평일에만 운영을 한다고 되어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주 3일 혹은 4일만 여는 식당들도 종종 보였다. 게다가 비정기적 휴일도 자주 있어 반드시 방문 전에 SNS를 확인하거나 전화를 해보고 가야 하는 곳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고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점차 이 방식에 적응이 되었다. 서울에서와 똑같이 지내려고 제주도에 내려온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워라밸’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숙박을 했던 장소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장기간 머물 숙소를 따로 정하지는 않고 일정에 맞게 옮겨 다니는 것을 택했고, 아무래도 짧은 여행에 비해서는 가성비를 중시하면서 숙소를 고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 인상적이었던 두 곳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제주시 조천읍에 있던 <비안>이라는 펜션이다. 이곳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이기도 했다. 넓은 잔디밭에 서 있는 하얀색 건물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삼나무들, 그리고 귤밭의 풍경이 근사하다. 여기엔 주인 부부가 거주하는 공간과 다이닝 공간, 그리고 2인 숙박을 위한 공간들이 나뉘어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마당에는 수국과 치자꽃, 연보라색의 아가판투스가 피어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조식을 먹으러 다이닝 공간에 가자, 탐스럽게 핀 푸른색의 수국들과 은은한 향을 내는 치자꽃 한 송이가 테이블 위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깔리고 주인분이 커피와 프렌치토스트를 내오신다. 눈앞에는 초록색 잔디와 오름(알밤오름)이 펼쳐져있다.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침이라니...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는 오감을 열어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며 이 시간을 음미하고 마음에 새겼다.
한라산 근처에 있는 <난타 호텔>도 기대 이상이었던 곳이다. 저렴한 숙소들에 조금 지쳐 단지 깔끔하고 쾌적한 호텔을 원했던 것이었는데, 방에서 보이는 전망이 머무는 내내 기쁨을 주었다. 침대에 누우면 하늘이 창 전체를 통해 보이고, 묵던 방의 높이까지 올라와있는 소나무들이 함께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소나무 옆에 있는 대나무의 연초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파란 하늘과 짙은 녹색의 소나무, 연초록의 대나무 잎과 밝은 청색을 띤 수국들의 조화는 참 아름다웠다. 이 풍경 속에 제비가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생기를 불어넣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있는 오름들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주에서 이런 좋은 공간들을 계속 접하면서 ‘취향’이라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의 취향이나 안목을 드러내 보이는 일. 그 공간을 찾은 이들도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남도 이롭게 하는 일이랄까?
이건 꽤나 근사한 일이 아닌가. 아, 진심으로 부럽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세상은 한 정치인의 죽음과 관련된 뉴스로 떠들썩했고 나 또한 착잡함과 좌절감이 뒤섞인 감정들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떤 큰 가치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스스로 그 가치를 배반하고 도망치듯 세상을 떠났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권력이나 정치는 또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의 모습이 이곳 제주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름다운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짓고, 소박하지만 실은 단단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며 남과 무언가를 나누는 사람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내 삶을 지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