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 재레드 다이아몬드(김영사) ●●●●●●●○○○
용서는 다른 뺨을 내밀라는 단순화된 개념으로 잘못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용서부터 보복까지 상황에 따라 대응이 달라지는
무척 복잡한 대응 시스템의 일부이다.
. '총, 균, 쇠'와 '문명의 붕괴'를 통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어떤 책이든 쓰면 팔리는 베스트셀러 연구가가 되었다. 더 이상 팔릴 걱정이나 독자의 기호에 구애받지 않고 재레드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이 최고의 판매전략이 된 상황에서, 70이 넘은 노학자는 드디어 여한없이 한평생의 연구결과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인데, 그래서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비교와 대조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고 딱히 일관된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다른 측면에 대한 11개의 논문을 읽는 느낌이다. 뭘 써도 팔린다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
. 총, 균, 쇠에서 그랬듯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는 역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집단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 특정한 지역의 인구와 밀집도가 결정되며, 그에 따라 무리 / 부족 / 군장사회 / 국가라는 집단이 형성되어 서로 다른 사회와 생활 형태를 가지게 된다(우리는 흔히 이를 씨족-부족-군장-중앙집권이라 배운다). 집단은 사회발전의 단계에 따라 무리에서 국가 방향으로 확장되는 게 보통이지만 때로는 퇴행하기도 하며, 지역마다 발전의 속도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특정 시점에서 볼 때는 한 쪽은 발전된 집단이고, 한 쪽은 미개한 집단이라고 생각해버리기 쉬운 것이다. 실제로 그 속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 때문에 그냥 '운'인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다름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우리와 - 그리고 그들끼리도 다른지, 왜 다른지를 탐구한다. 그가 탐구하는 영역은 일반적인 조직운영과 경제활동 뿐만 아니라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묻는 문제, 부족끼리의 전쟁, 노인과 아이를 대하는 태도, 언어, 위험에 대한 대처, 건강 등 폭넓은 생활 전반에 걸쳐 있다. 어떤 부족은 현대인들이 보기엔 끔찍하게도 노인을 직접 살해하지만, 반대로 노인을 깍듯이 공경하는 다른 부족은 부모를 양로원이나 요양병원에 보내는 현대인들은 부모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들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또한 우리가 보기엔 부모가 아이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못한 채 아이에 매여 사는 것처럼 보이는 부족도 있지만, 반대로 현대사회의 아이들이 지나치게 과잉보호되어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는 부족도 있다. 수많은 형태가 존재하고, 그 형태간에 어마어마한 편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차이에서 배울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
. 그래서 저자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양한 삶의 선택지가 남아있을 수 있도록 - 이러한 집단과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 단일한 문화는 결국 정체되기 마련이며, 다른 문화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집단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파국으로 치닫게 할 위험이 높다. 물론 여기서 '보존'하자는 건 그들을 폐쇄적인 공동체로 남겨두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고립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폐쇄적인 공동체가 쇠퇴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부족사회를 연구해 온 재레드 다이아몬드지만, 그렇다고 그가 옛 삶을 보존하고 있는 부족 사회가 옳고 발전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사회를 존중하고 그들이 그들의 삶과 선택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 이를 통해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가능성을 남겨두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속해 있는 사회는 다양한 인간 문화에서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 작은 조각에 불과한 사회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그 사회들이 다른 사회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다. 농업을 생각해내고 야생동물과 야생식물을 길들인 덕분에 테크놀로지와 정치력과 군사력에서 우위를 차지한 때문이었다. 이런 특별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산업사회들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노인을 대우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비전염성 질병과 그 밖의 사회적 문제를 억제하는 데는 우월한 방법을 개발해내지 못했다.
- p. 682.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