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에서 연대와 투쟁에 이르는 한 걸음의 이야기

걷기의 인문학 - 리베카 솔닛 (반비)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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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은 땅을 소유하는 대신 땅을 경험한다.



. 이 책, 만만치 않다. 제목으로만 봐서는 여행이나 산책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고 거기다가 이런저런 개인적인 생각을 좀 얹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초반 1-2장을 넘어섰더니 갑자기 선사시대 인류사가 등장하고, 중세시대 신에게로 나아가는 걸음의 이야기가 한 챕터를 차지하더니, 작가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지나 각계 각층의 투쟁의 이야기가 책을 채운다.


. 솔닛에게 걷기는 개인적인 자유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대중적인 투쟁이기도 하다. 아직 걷는 것에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가 없던 시절, 몇몇 선구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익숙한 지역을 벗어나거나 낮시간이 지나면 바로 위험해졌으니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고, 시간이 지나 이러한 교외여행이 일상화되자 사람들은 다시 자연과 비교해 자신들의 일상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체험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타인과 교류하면서 하나의 '대중'이 되었다. 걷는 것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행은 땅을 소유하는 대신 땅을 경험한다. 움직이는 중의 경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경험, 모두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경험이다. 유목민들의 이동 생활이 국경에 구멍을 냄으로써 국가주의를 어지럽혔다면, 보행은 사유지 울타리라는 작은 국경을 상대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 p. 264. 보행을 위한 모임들, 통행을 위한 투쟁들




.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서 솔닛은 '현대의 걷기'를 이야기하면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갈수록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다. 걷는 행위는 자유로워지고 치안은 개선되었지만 자동차가 증가하고 공간이 점점 사유화되면서 걸을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인 자유는 끊임없이 축소되어 간다. 도시는 차로 가득 차 있고, 폐쇄성으로 무장한 아파트 단지들은 얼마되지 않는 인도조차도 사정없이 차단해가고 있다. 심지어 지방은 인도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지방에 내려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산 너머 평택까지만 내려가도 인도가 뚝뚝 끊겨있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뒤늦게 올레길이니 성곽길이니 강변길이니 하며 걷는 길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과연 이를 통해 걸을 수 있는 자유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혹여나 보호구역처럼 일종의 고립된 공간이 되는 것이나 아닐지 - 기우였으면 하는 걱정으로 읽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 참, 처음에 제목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이 책의 원제는 'A History of Walking', 걷기의 역사라고 한다. '걷기의 인문학'보다야 이쪽이 훨씬 책 내용에는 부합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인문학이 한 때 붐이기도 했고, 그 덕인지는 몰라도 베스트셀러도 되었으니 좀 더 마음을 누그러뜨려도 될 듯하다. 무엇보다도, 요즘처럼 출판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말 심각한 무리수가 아닌 바에야 일단 팔리기만 하면 다행이다 싶긴 하니까. :)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있다는 것은 도시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 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 관찰자의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장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

- p. 302. 혼자 걷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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