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서 하나로 이어진 "교고쿠 나츠히코 월드"

후 항설백물어 - 교고쿠 나츠히코(비채)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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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연일까." 겐노신이 중얼거렸다. "정말 우연일까요, 그게?"
"결단코 우연입니다."



풍경 장수와 스쳐 지나거나,

수로가의 바람이 버드나무를 흔들거나.

그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옛날 소리, 옛날 냄새, 옛날 풍경.... 이런 것들이 얄팍해져서 어딘가에 들어붙어 있는 요지로의 옛날에 스며들면 찰나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사실은 지금의 소리이고 지금의 냄새이고 지금의 풍경이므로 만들어지는 것은 모조리 거짓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상기하는 과거란 분명 전부 거짓이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그립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래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인가.

- 하권, p. 252-3, '바람신'



. 사실 후 항설백물어가 처음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쉬웠던 건 상, 하 권으로 분권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속 항설백물어'가 워낙 두꺼웠고 실제로 들고 다니며 읽기 꽤 버거웠으니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교고쿠 나츠히코의 정체성 중 일부는 '벽돌책'에 있지 않나 싶은 혼자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작 책을 읽어보니 상권과 하권의 구성은 꽤 달라서 맥이 끊어진다는 싶은 느낌보다는, 실제로도 1부와 2부로 나눠진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이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청년 넷과 외곽의 야겐보리에서 은거하고 있는 잇파쿠 옹, 그리고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사요라는 처자가 옛 괴담을 나누는 게 1부의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청년 넷 중 기타바야시 번(속 항설백물어를 읽었다면 아, 싶을 것이다)의 옛 가신이었던 요지로가 점점 전면으로 나타나고, 그들이 나누던 멀디 멀었던 옛 괴담들이 조금씩 이들이 살고 있는 현재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결국 마지막 이야기에 이르면 괴담이 현재를 따라잡으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니 이런 식이라면 분권도 마냥 나쁠 건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속 항설백물어가 워낙 두껍긴 두꺼웠으니까. :)


. 항설백물어의 시작점으로부터 대략 반 세기, 속 항설백물어의 마지막 후일담으로부터도 사십 년 정도는 훌쩍 넘어갈 법한 길디 긴 시간이 흐른 후, 이제는 더 이상 막부도 번도 없고 요괴도 괴담도 빛을 잃은 것 같은 메이지의 시대에 '저쪽 한 켠'에 남은 노인을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 중에는 요괴 같은 게 어디있냐며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미신을 믿는 사람도 있으며,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서 어정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그들이 때로는 옛 이야기를 붙잡고, 혹은 알 수 없는 사건과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다 옛 이야기에 밝은 노인인 잇파쿠 옹을 찾아오고, 노인은 자신이 모모스케였던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낸다. 안개에 덮인 이상한 섬과, 원한에 사로잡힌 불꽃과, 날아오르는 뱀과 산사람, 그리고 빛나는 백로에 이르기까지. 항설백물어와 속 항설백물어가 그랬듯, 괴담을 만드는 것도, 괴담을 이용하는 것도, 괴담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다. 교고쿠도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이 세상에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네'라는 한 마디는, 여기서도 형태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우연일까." 겐노신이 중얼거렸다. "정말 우연일까요, 그게?"

"결단코 우연입니다."

노인이 보기 드물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 마음이 천지의 이치를 좌우한다는 건 거만한 생각이 아닐까요? 사람은 고작해야 지혜를 가진 짐승. 영리하기는 하지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신불처럼 천연 자연을 조종할 수 있을 리 없지요. 그러니까 이건 어쩌다 일어난 일입니다. 우연히 사람 마음에 부합하는 현상이 일어난, 아니.... 우연히 일어난 현상을 사람이 제멋대로 해석했을 뿐일 테지요."

"얼굴이 있는 게 아니라 얼굴을 보는 것이로군요."

- 상권, p. 278. '하늘불'




. 후일담의 형태를 하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에 후 항설백물어의 이야기는 빛바랜 느낌을 많이 띤다. 이제는 야겐보리에 은거하는 잇파쿠 옹이 된 모모스케의 온화하지만 느릿느릿한 이야기는 마타이치 일행의 실감나는 활약상으로 독자를 압도하던 전편들과 비교하면 많이 밋밋하다. 섬이 사라지고 잘린 머리가 걸리고 집이 통째로 날아가는 어마어마한 사건들도 그 위에 몇십년의 세월이 묻어나오고, 거기에 모모스케의 입을 또 한 번 거쳐나오면 씁쓸하고, 깊은 회한이 남는 얘기들로 바뀐다. 거기에 슬쩍슬쩍 제시되는 반가운 이름과 말 조각들이 전편부터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를 흔들어댄다. 그렇게 이 책은 아련하디 아련한 괴담들로 채워져 있으니, 이 책에 호불호가 갈린다면 - 특히나 앞선 책들을 읽지 않고 이 책으로 바로 왔다면 더욱 - 아마도 이런 부분이 아닐까.


. 특히 전작의 독자들이 그 무엇보다 바라고 있었을 마타이치의 이야기가 나오는 '오품의 빛'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아련함의 절정을 달린다. 기타바야시의 후일담으로부터도 이십여 년이 더 지난 시점. 모모스케가 발을 빼고 에도로 - 그리고 '이쪽 편'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시절에도 마타이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관여한 일에 책임을 지고 그 일로 인해 인생이 바뀌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가면서, 그렇게 모사꾼으로, 야타가라스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문장에 이르면, 모모스케가 그랬듯이 독자 역시도 눈을 내리깔게 된다. 그리고 모모스케의 혼잣말처럼 '어쩌면, 지금도.'를 중얼거리게 된다.



"마타이치 씨라니.... 하지만 어르신, 이십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마타이치 씨는 그런 사람입니다." 모모스케가 말했다. (중략)

"알겠습니까, 요지로 씨. 한 장의 종잇조각, 세 치 혀만으로도 사람의 일생이라는 건 크게 바뀌고 맙니다. 마타이치 씨가 하는 모사꾼이란 그런 일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도 필요하고 책임도 필요합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나 생각없이 한 분별 없는 행동으로 사람은 간단히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마타이치 씨는 그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 하권, p. 217-8, '오품의 빛'


[이 이야기에 이르면, 역시 이 책은 교고쿠도 시리즈를 다 읽고, 항설백물어 시리즈도 다 읽고, 특히 '웃는 이에몬'까지 읽고 나서 맨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을 모두 따라온 끝에 이 책을 만난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전혀 다를 수밖에.]




.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더 빠르게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 마타이치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고, 또 굶어죽을 뻔한 사요를 구해준 이의 이름을 보고 낮은 탄성을 질렀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 작은 장치를 통해, 몇 년에 걸쳐 그의 작품을 따라오다 이제 한 세계관의 마감을 지켜보며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다른 세계관으로 이어준다. 그렇게 항설백물어의 세계관은 거미줄보다도 가느다랗지만 확실한 연결선을 통해 교고쿠도의 세계관과 이어지고, 교고쿠도의 세계관은 또 서류조당과도 이어지니 저 작은 장치 하나로 거대한 교고쿠 나츠히코 월드가 완성되는 것. 더구나 서류조당 후편도 있고, 교고쿠도 시리즈도 아직 "많이" 남았으니. :) 덕분에 독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계속 이어져 나갈 교고쿠 나츠히코의 신작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안은 어두웠다.

밖이 너무 밝았는지도 모른다.

마루와 복도는 새하얗게 보였다. 역시 여름 햇살이다.

짤랑, 하고 풍경이 울렸다.

복도를 지나 별채로 이어지는 복도를 건넜다.

삐걱삐걱 바닥이 울린다. 겨울철에는 소리가 건조하지만 여름철에는 소리가 듣기 좋게 늘어진다.

대여섯 번 이 소리를 들으면 별채 장지문 앞이다.

"어르신, 요지로입니다."

대답이 없었다. 요지로는 장지문을 열었다.

늘 똑같은 별채, 무수히 쌓인 책, 먼지와 종이 냄새, 등심초 향, 꾸미지 않은 좁은 방.

명장지가 활짝 열려 있다. 거기서 여름이 쏟아져 들어와 다다미 색깔을 두 개로 나누고 있다.

그 빛 속에.

노인이 누워 있었다.

- 하권, p. 341. '바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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