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된다. 당연하지 -

망량의 상자 - 교고쿠 나츠히코(손안의책)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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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이라도 신용해버리면 미마사카 씨, 당신의 패배입니다.
이것이 저주라는, 당신들의 분야에서는 다룰 수 없는 저의 유일한 무기지요."




. 이 책, 화려하다. 집어들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책표지부터, 청초하고 아름다운 자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상적인 사각건물과 그 안에서 등장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천재과학자. 그리고 소실과 토막살인이라는 확실한 시각적 효과까지.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이 음울한 분위기를 피워내면서 발밑을 스물스물 감싸돌고 있었다면, 망량의 상자는 처음부터 충격적인 장면들을 쏟아낸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전개가 빠르고 가독성이 높다. 종교, 영능력, 점술, 초능력을 넘나들면서 사이비 영능력자의 예지를 파헤치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여전하지만, 그 장광설조차도 쉽게쉽게 읽히는 느낌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여느때보다도 많이 등장하고, 전작에서 에노키즈 홀로 고군분투하던 유머러스한 부분은 도리구치가 가세하면서 한껏 끌어올려져 있다. 거기에 우락부락한 형사의 적당한 로맨스까지. 데뷔작을 쓰고, 읽어보고, 거기서 안 팔릴만한 요소는 전부 배제하고, 매력적인 요소는 최대한 채워넣었다. 이미 교고쿠 나츠히코도 쓰면서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이 책은 된다, 당연하지 - 라고.


. 교고쿠도 시리즈가 늘 그렇듯, 트릭은 간명하다. 여러 관계없는 사건이 중복되어 있고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하려는 분위기 때문에 헷갈리기는 하지만,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여느때처럼 작가가 "대놓고 주는" 힌트에 집중한다면 대부분의 사건은 극히 단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우부메의 여름'이 그렇고 '광골의 꿈'이 그렇듯, 사건의 전말 뒤에는 말도 안되는 함정이 숨어있고,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의 함정은 좋게 말해 판타지 수준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다, 사기. ^^;


. 세키구치 1인 시점을 고수한 전작 우부메의 여름과 달리 이 작품부터 교고쿠 나츠히코는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다. 인물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고, 작가는 그것을 때로는 복선으로, 때로는 함정으로, 때로는 평면적인 캐릭터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첫 사건의 목격자였던 요리코는 소녀 특유의 목소리로 사건을 서술해나가지만 그 뒤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숨겨져 있다. 전작에서 단순한 열혈근육바보형사로 여겨졌던 기바 슈타로는 튼튼한 '상자' 속에 닫혀져 있던 내면을 살짝 풀죽은 투로, 하지만 담담하게 얘기해가면서 이야기에 색을 불어넣는다. 무엇보다도 전작의 초미남초능력바보탐정이었던 에노키즈에 이르러서는, 의외로 상식인이라는 교고쿠도 시리즈 최대의 반전이. :)


. 전작도 그렇고 이후의 작품들도 그렇지만, 교고쿠도 시리즈의 범인들은 선악이 불분명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데 뒤엉켜 있어 법으로 처벌하기에도, 이야기 속에서 비난하기에도 뒷맛이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망량의 상자만큼은 법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해도 비난하기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흔히 하는 얘기로 '악의 최종보스'라고 할만한 인물이라고 해야할까. 이렇게 뒷맛이 깔끔한(?) 상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게 특이하고, 읽는 이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글프고 아련했던 우부메의 여름이나, 어리석은 집념이 되려 우스꽝스럽고 안타깝게 보이던 광골의 꿈과는 달리, 상대의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끝까지 쫓아가 숨통을 끊어버리는 이런 확실한 결말은 망량의 상자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결말이 - 나에게는 오히려 뒷맛이 나쁘게 느껴졌다.




나는 상상한다.

아득하고 황량한 대지를 혼자서 걷는 남자.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자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있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걸어간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 -

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 하권, p. 502.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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