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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이 Apr 10. 2021

콩닥콩닥 나들이, 곱씹어 보는 추억

파주 출판 도시를 다녀와서


 파주 출판 도시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길을 내고 있었다. 건물로 이야기를 하듯 저마다의 자태를 자랑했고, 그 건물 안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의 발길도 길을 만들고 있었다. 건물 안, 많은 책 속의 주인공들은 자기의 얘기를 펼쳐보라는 듯 말을 건넸다. 그 책을 쓴 작가의 빛나는 발자취들도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따라들어 갈 수 있는 발자국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길은, 우리 역사의 흔적이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일상의 일부분이었다. 혹시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맴돌다 외면해버렸던 마음속에 뭔가를 일깨워 주고 싶은가? 그러면 여행을 떠나보라.


 우리가 파주출판단지를 찾아 나서던 날, 비가 오고 있었다. 낯설고 추운 버스 안에 올라서자 따뜻한 떡 한 덩어리가 손에 쥐어졌다. 그야말로 이게 웬 떡인가! 아침을 먹지 못했던 터라 어찌나 반갑고 훈훈하던지… 넉넉한 인심에 길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활기차게 인사를 나누며 출발했다.


 건축과 책의 조화로 인간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파주출판도시. 그날은 보슬보슬 비가 와서인지 처음엔 여느 회색빛 도시와 별 다르게 다가오지 않았다. 운전사의 부주의로 나무와 부딪혀 금이 간 창문의 생채기마냥, 책잔치 행사들이 궃은비로 망쳐지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서성거리는 사람들과 물방울을 튕기는 우산들 아래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추워서 고릴라처럼 고개를 수그린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사마귀마냥 고개를 돌려대는 사람들, 너털한 비옷을 서걱거리며 소리를 내는 사람들 모두 동화세상으로 가는 책냠냠이들답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첫프로그램은 손바닥 그림책 만들기와 찰흙빚기 였다. 책냠냠이들은 신나게 자신의 그림책을 만들어 갔다. 또한 끈적끈적한 흙 속에 제 마음과 손을 맡기고 어떤 형상들을 만들어나갔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다음 코스인 책인쇄과정 보여주기 예약을 위해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파주출판단지 맨 끝부분에 헐레벌떡 발품을 팔아 갔으나, 밀린 일이 많아서 오늘은 책인쇄과정 견학을 할 수 없다는 회사측의 설명에 아쉽게 아시아출판센터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말자 잠시 실망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잊혀졌다. 전시회가 너무나 인상적이고 볼거리가 풍성해서 금새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는 전시회가 되었다. 꿈꾸는 건물 안에 사람들 가슴과 영혼에 울림을 주려는 작가들. 자신을 극복해내고 꿈을 실현한 동화 주인공들과의 행복한 만남의 자리였다. 동물과 사람과 식물이 환상적인 색감안에서 어찌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던지, 그렇게 보기 힘든 원화들을 한꺼번에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격스러웠다. 그곳에는 작고한 이우경 선생님의 원화인 “끼우뚱 등장 인물들의 재밌는 모습들도 있었다. 그 원색의 화려함과 토속적인 것에 정겹지 않을 한국인이 있을까? 아이들도 웃음을 머금으며 그림에 눈길을 주었다.


 또한 존 보닝햄, 레이먼드 브릭스, 얀 피엔코프스키, 세이무어 크와스트 등 20세기 후반의 세계적인 그림작가들의 것들도 보였다. 일본의 반전평화운동가인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책전시회도 있었다. 우리집에 있는 한글번연본과 비교하면서 봤다. 그 감상을 이 짧은 지면에 다 실을 수가 있겠는가? 저멀리, 해지는 노을을 안고 있는 커다란 창가에 앉아 허겁지겁 먹었던 점심이 달콤했던 것도 모두 그 원화들을 보면서 전해진 감동때문이었다.

 밥을 먹고 다시 웅크러져 있던 우산을 펴 들고, 출판사 건물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처럼 간 곳이 쌈지였다. 예전에 헤이리 마을에서 ‘딸기가 좋아’라는 쌈지 소속의 건물에 반한 적이 있었던 터라, <쌈지>에 대해 기대를 좀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일인가? 아이들 놀이방 시설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래서 여러 캐릭터의 스티커를 기념으로 받아서, 손등,뺨 등에 붙이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너에는 한솔출판사 건물이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 책냠냠이들이 좋아하는 <구름빵> 원화 표지가 우리에게 손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기쁜 일은 이 작품이 볼로냐일러스트레이터 선정 작품이 되었다는 거다. 어찌나 자랑스럽던지…역시 아이들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리더니 영광의 타이틀을 걸머진 것을 보니 너무나 뿌듯했다.

 우리 둘째냠냠이는 한솔 책 중에서 실제 크기를 느끼게 해주는 동물 그림책을 좋아했다. 특히 코끼리의 코를 책 8페이지에 걸쳐서 펼쳐보여 주었더니 코끼리 코를 방바닥에 늘어놓고는 침대처럼 누워봤다가, 구부려서 미끄럼을 타는 시늉을 해보곤했다. 


 다음에 간 곳은 푸른숲이었다. “동화 속 주인공을 보면서 가슴 뭉클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는 김향이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고 여러 인형들이 우리의 잊혀졌던 유년을 올곧게 펼쳐보여 주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300여 점의 김양이 작가의  인형들. 여행지에서 사왔거나 친척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들. 재활용 수거함에서 버려지거나 벼룩시장에 나온 것들을 모은 것들이라 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어린왕자, 라푼젤, 소공녀, 톰 소여의 모험,몽실언니, 콩쥐팥쥐… 정말로 어린시절 나의 유년이 함께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파랑새 어린이 코너에는 외눈박이 덕구, 멍깨비와, 밥할머니, 배꽃 향기 등이 나름대로의 향기와 정감으로 누워 있었다. 토속적인 국내 창작물이기에 애착이 가는 출판사였다.


 우리가 간 날, 창작과 비평에서는 팔리지 않은 책들을 할인해서 팔고 있었다. 난 항상 창비하면 맏아들이 떠오른다. 창비의 책들도 우리 사회에서 든든한 맏형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곳에는 윤석중 선생님의 <넉 점 반>의 원화가 벽의 동선을 유도하고 있었다. 책제목 <땅에 그리는 무지개>처럼 하늘에서의 꿈의 실현이 아니라, 부조리한 땅에서의 무지개가 되기란 얼마나 힘든 세상인가? 그런 것을 지켜내는 강한 힘을 갖고 싶다. 내안에 다른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는 나의 세계를 지켜내는 힘. 우연한 재난과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그런 세상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창작과 비평 계단을 내려오면서 했다.


 다음에 만난 것은 그림책 상상놀이 “칙칙폭폭 그림책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조개껍데기로 입장권을 사면서 시작되는 이색 이벤트. 미로 속으로 약간의 모험심을 유도하고, 빨 수 있는 것을 빨아 보라고 아이들 마음을 마음껏 펼쳐보이게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빨간 고무통에 한껏 담겨 있던 그림책들. 우리는 그 안에 몸을 동그마하게 하고선 색색 숨소리에 맞춰 그림책을 호흡했다.


너풀너풀 아이들의 그림이 빨랫줄에서 비를 맞다가, 바람을 맞다가를 반복했다. 벽화에 그려져 있는 곰사냥을 떠나는 가족처럼, 우리들도 모두 책사냥을 끝내고 침대로 들어가팠지만, 쌀쌀한 기운도 잠시 잊을만큼 널브러져 있던 책들 속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뜨끈한 된장국과 보송보송한 이불이 그리워질 무렵 몇 군데 출판전시회를 더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쉬움도 많았다. 제대로 된 공연을 보지 못했다는 점. 즐길수 있는 놀이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다는 점. 여러 자료들을 디지털의 정리된 영상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 세계적인 팝 아트북 같은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실현시기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남겨진 기억이 더욱 소중했다. 개똥이네 딱지를 집에 가져와 책냠냠이들과 재밌게 놀았고, 어지럽게 들고 왔던 책소개 목록들을 버스에서 읽는 즐거움도 솔솔했다

 출판인들이 꿈꾸는 파주 출판도시는 헤이리 예술마을보다 볼거리가 그리 풍성한 것은 아니었다. 헤이리는 다방면의 문화를 즉석에서 향유할 수 있고, 사진에 담을 이색적인 행사도 많았었다. 그렇지만 출판단지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다. 책과 마음껏 놀 수도 있고, 책을 거울삼아 아이들의 상상을 비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너무 많은 책무덤 때문에 나중에는 좋은 책에 대한 감흥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가끔씩 책냠냠이들의 감탄사와 함께 만난 책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얘기꺼리를 제공했다.


 파주의 길 한 복판을 걸으면 수많은 이야기 주인공들과 작가와 그 책을 보듬고 있는 건물들이 이야기를 건네온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좀 기울여 보라고, 아니면 네 마음속에 담아 놓은 이야기를 꺼내 줄 테니 책을 한 번 열어보라고 한다. 책 속에는 상상하는 것들과의 위대한 만남이 있다. 파주출판단지가 답답한 도시 한가운데서 그리 홀연하게 책들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는 것이 어찌나 고맙고 든든한지…


 책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그날까지 파주출판인들이여! 

 끊임없는 비상의 날개짓을 멈추지 않길 바라는 바이다. 

 

 또한 수많은 책 속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원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코트깃을 세우고, 눈을 번뜩이며 헤이리로 향해보라고 귀뜸해주고 싶다. 그곳에는 우리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또다른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책과의 여행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상과의 위대한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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